음악이야기

로고스 앙상블 정기연주회: "쇼팽의 로맨틱 속으로" (5.25.)

Alyosha 2009. 5. 31. 03:53


 
 지난 월요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감상했던 '로고스 앙상블'의 제 5회 정기연주회.

 로고스 앙상블의 회장인 전경주 선생은 연주 전 소갯말에서, 쇼팽을 흔히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일컫는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이날 우연히 시간이 맞아 함께 연주회에 갔던 친구는, 심보선 시인을 인터뷰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의 시 <풍경>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풍경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 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하게 불켜지는 창문들.
 
    3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저는 아직 클래식의 문외한 격이지만, 쇼팽의 곡을 들으면 그가 참으로 감상적인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성을 건반 위에 펼쳐놓는 작곡가로서의 쇼팽의 흔적은, 제 심경을 온갖 언어와 이미지를 동원하여 어떻게든 '호소'하려 하는 시인의 여리디 여린 감성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전경주 선생이 첫 막을 열었던 2 Mazurkas Op.17 No.1/Op.68 No.2는 소박했습니다. 마주르카는 폴란드의 3박자계 민속 무곡이라고 합니다. 전 선생님의 스타일 역시 조금 밋밋하리만치 소박한 듯 느껴졌습니다. 

 
 다음 피아니스트 이은희 씨의 5 Etudes from Op. No.4,5,6,7,8. 아름다운 선율이었고, 그에 더해 이은희 씨의 힘차고 박력 있는 연주가 인상 깊었습니다. 함께 간 친구는 이 분의 연주를 최고로 치더군요.

 김건아 씨의 Ballade No.1 in g minor, Op.23. 김건아 씨의 연주 스타일은 아담하고 여리게 느껴지더군요. 곡과 잘 결합되었던 듯싶어요.

 다음으로 천현정 씨의 Barcarolle in F sharp Major, Op.60 과 Fantaisie-Impromptu in C sharp minor, Op.66. 바르카롤(뱃노래)은 듣기 참으로 편안했고, 다음으로 연주된 환상즉흥곡은 워낙 익숙한 곡이어서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저는 이날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들 중에서도 천현정 씨의 연주를 최고로 꼽았습니다. 강하면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진한 연주라고 감탄했어요.
 
 2부의 시작으로 최영아 씨가 Fantaisie in f minor Op.49를 연주했습니다. 현란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율.

 문현미 씨의 Valse brillante in A flat Major, Op.34, No.1Scherzo No.3 in c sharp minor, Op.39. 문현미 씨의 혼신을 다하는 연주의 모습, 그리고 저돌적이고 강렬했던 연주는 쇼팽의 왈츠, 스케르조와 참으로 잘 어우러졌던 듯.

 마지막으로 김지영 씨의 Ballade No.4 in f minor, Op.52. 김지영 씨의 세련되고 안정적인 연주를 끝으로, 이 날의 프로그램을 마쳤습니다.


 쇼팽의 아름다운 곡들과, 그 곡들을 자신만의 색깔로 풀어내는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저는 듣는 내내 즐겁고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좋은 시간 마련해 준 '로고스 앙상블'에게 다시 한 번 갈채를 보내면서, 앞으로도 참신하면서도 웅숭깊은 활동을 이어가기 바랍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