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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Alyosha 2009. 8. 16. 04:46


 이 책을 통해서, 일본의 근대사를 좀 더 역동적이고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나의 지적인 무지를 강하게 깨닫게 한 책이어서,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내게 커다란 매력을 지니는 인물이다.
 '아버지' 권위에 대한 증오와 거부의 기억…? 그의 개인사. (그렇다면, 나의 개인사는 어떤가?)
 그에게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마샬 맥루헌에 대한 주석)을 읽는다. 
 그리고 김훈. 그는 김훈의 정서를 더 깊게, 극한으로 밀고 나가는 것 같다. 현실 속에서.
 할복. 역사. 일본의 역사. 개인과 역사.
  




○ 미시마의 '멋진' 말들(남성성에 대한 그의 사랑과 향수):

* 말라르메가 "모든 책을 읽었노라. 아아 육체는 슬프다. 모든 책을 읽었노라" 라고 했을 때, 말라르메의 허리가 휘어 있었는지 곧았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지식인의 탄식이란 '모든 책을 읽었다'는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는 탄식하지 않는 지식인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책을 읽지 않고 대충 10권, 100권의 책을 읽었다고 안심합니다. 여기에도 안심해버린 눈이 있습니다. 나는 일본인의 안심해버린 눈 속에서 뭔가 불안을 읽어내려 합니다.

* 나는 제군들의 열정을 믿습니다. 그것만은 믿습니다. 다른 것은 일절 믿지 않아도 그것만은 믿는다는 사실은 알아주기 바랍니다.

* 나는 힘을 행사하면서 사랑받는 힘, 지지받는 힘이고자 하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책임 관념을 누락시키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자기 속에서 책임을 포착하려면 악귀찰나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증오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도의의 변혁이 성공한 예는 없다. 자기만이 언제나 옳다고 봐달라는 것은 계집애의 논리가 아닌가.


○ '윤리의 비대화' 현상에 대하여 
 → 현재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지식인들이라기보단 일반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식 말이다.
     일상의 피로와 불만이 '사회운동화' 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는, '공동체' 개념의 역사적인 결핍과 상흔이 어려있는 건 아닐까.
     한국의 공동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또는 시민사회적)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가족주의적 욕망의 총화일 뿐인가?

 "그럼에도 투쟁을 개인의 윤리 문제로 바라보는 눈은 종종 계급사회의 모순의 해결을 개별적인 자아에게 떠맡기게 된다. (…)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체제와 정치체제의 문제이어야 할 공산주의가 극단적으로 개인의 윤리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존재하는 개인을 윤리의 주체라는 극한의 지점에서 파악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혁명가들의 이런 발상에는 투쟁 속에서 윤리의 비대화를 낳고만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하세가와 히로시)


○ 혁명에 대해서 
 → 혁명과 '예술적' 태도, 혁명과 일상

 "저는 사물 그 자체와의 만남, 즉 사물의 개체성이 갖는 여타의 관계성이 모두 사상(捨象)되고, 사물 그 자체로 자기와 만나는 것, 그러한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유희의 감각, 이런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것, 아마 이런 일이 혁명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기무라)


○ 일본에 대하여
 → 일본 · 근대성 · 한국과 일본

* "문학 속 남녀관계로 보면 남자는 자기의 정념을 이미 외래문화에 기대어 기록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외래문화의 틀, 즉 통치의 틀 속에 외래문화의 문화성인데,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문학이 성립되어왔습니다. 남자의 경우에요.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태고부터의, 즉 <고지키>로부터의 정념이 지금의 일본까지도 이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를 약간 하죠. 그러한 구절을 봤을 때 한 독일 사회학자가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일본 사회의 지배자는 여자라고 10년 전에 분석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 "그러니까 일본 자본주의는 불교식 자본주의인 겁니다. 유럽의 자본주의가 퓨리터니즘의 자본주의라면요. 생산 시스템을 지탱한 것은 불교니까 상품 생산에서의 신체의 애니미즘이죠. 냉장고 만들 때도, TV 만들 때도 자기 얼굴은 나오지 않습니다. 상품이 바로 자신이죠." (기무라/아쿠타)

* "지금도 일본어로 말하는 순간은 내가 일본인이라고 느낍니다. 프랑스어에는 'vous', 'tu'의 두 가지 2인칭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누구에게나 'vous'(당신)를 써도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본이었다면 끊임없이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하는 걱정을 하잖아요. 그 걱정이 갑자기 없어졌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안심이 되었죠. 역으로 말하자면 일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뭔가 굉장한 억압을, 보이지 않는 억압이지만 신체적으로 느끼죠. (…) 네. 모리 아리마사가 제가 지금 있는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는데, 그는 일본을 생각할 때 프랑스어와의 차이를 기점으로 사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일본 사회 속에서 40년 동안 살면 파김치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증거로 예를 들어 일요일 낮에 애들 데리고 공원에서 보트 타고 노를 젓고 있는 아빠의 얼굴을 보라고, 그것이 피폐한 인간의 얼굴이라고 말입니다." (아사리)

* "표의문자의 특징은 문자의 수가 아주 많다는 겁니다. 의미는 어느 말이나 아주 많으니까요. 그 결과 문자를 외우는 것이 어렵고,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계층의 사람 수가 아주 한정됩니다. 즉 교육이 아주 어려운 거죠. 그래서 한 줌의 지식인과 비대한 서민이 나뉘어집니다. 중국은 실제로 그렇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주변국인데다가 표음문자,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동시에 사용합니다. 그래서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문자를 못 읽는 사람을 적게 할 수 있었죠. 중국보다 교육이 유리해집니다. 에도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읽을 수 있었고 한자에 대한 후리가나 덕분에 존황양이 사상 같은 것도 접해볼 수 있었기에 대중의 지지 하에 상당히 고도의 내셔널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국어의 성립과 깊은 곳에서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서민이라도 단카를 읊조리거나 하이쿠를 쓰거나 하는 일이 아주 일상적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내셔널리티의 형성에 일본어의 구조가 크게 연관됩니다." (하시즈메)

* "좌익의 방식은 코스모폴리터니즘, 즉 세계 동시 혁명을 사유하고 일본보다 먼저 계급이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혁명을 과제로 삼으면 된다는 식이었죠. 이런 식으로 네이션 문제를 건너뛰려고 한 겁니다. 즉 네이션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 또는 안 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이었던 거죠. 우익의 경우 네이션을 보다 강력하게 형성하자는 방식입니다. 서구적인, 개인이 먼저 있다는 방식보다도 일본처럼 개인을 초월한 공동체가 있고, 그 안에 국가가 있다는 방식이 더 아름다우니까, 일본의 고쿠타이를 긍정해야 한다는 식이죠. 이런 식으로 후발성을 뛰어넘으려 한 거라 생각합니다. 좌익도 우익도 모두 엉터리죠. 미시마 씨는 이 좌익과 우익의 엉터리짓에 짜증이 난 거라 생각합니다. 전공투도 마찬가지로 짜증이 났던 거죠." (하시즈메)

* "네이션이라고 할 때 가장 신성한 건 개인이고, 네이션은 개인을 모아놓은 역사 같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세속으로서의 국가를 자기들 목적에 맞게 만든다는 순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가를 개조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일본의 경우 국가가 있고 다음에 국민이 있습니다. 국가 쪽이 개인에 선행하고 신성하니까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겁니다. 국가를 비판할 수 없는 인간은 개인이 아닙니다. 만약 여기서 그래도 개인이고자 한다면, 아주 커다란 질곡을 각오해야만 하는 겁니다." (하시즈메)

* "프랑스와 일본의 차이는 확실히 있는 것 같지만, 일본은 말하자면 똑같은 사람만 모여 있는 내부인 셈입니다. 그래서 나는 젊었을 때 여러 가지가 자의식에 따라다니는 것 같아 싫었죠. 그래서 아쿠타 씨의 극단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자기 외부는 어디까지나 외부라서 탐나는 거죠. 그러면 실제로 분명히 선이 그어지지만, 자신의 외부가 내부였던 시절에는 끔찍하게 괴로웠죠." (하시즈메)

* "바타이유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보면, 우선 고대와 현대의 시대적 편차는 있지만 모든 사회를 관통하여 변하지 않는 사회의 기본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신화', '제의', '성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본 조건은 어떤 사회라도 갖고 있다는 거죠. 사르트르적 문맥에서는 이 세 가지가 항상 마이너스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신화, 제의, 성스러운 것 등은 카타스트로피를 가져오는 쪽에 위치지어져 부정적으로 인식되죠. 이에 반해 이것들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바타이유는 주장합니다. 이 세 가지가 앞으로 변용되기는 하겠지만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양의성을 인정한 위에서 사유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가 사회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공동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축을 기본 조건으로 가져야 하기 때문에, 신화나 제의나 성스러운 것의 문제를 현대적으로 묻는 형식으로 자기 비판적인 사유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 바타이유의 기본 입장이었습니다." (아사리)

* "아무튼 내 생각을 말하면, 일본인의 경우 '나'가 되면 안 된다는 느낌이 아주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전공투도 그렇죠. 그러면 아무래도 집단적이거나 공동적이거나 전공투적이거나 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교육의 장, 즉 스스로가 그 속에 있는 장을 바꿔야 한다는 식의 공간적인 전술을 취하게 됩니다." (하시즈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