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관하여

임지현 · 김영하와 '국가'에 대한 메모

Alyosha 2010. 6. 25. 14:53



임지현 교수의 '트랜스'한 시각을 참신하게 구현한 인물이 김영하가 아닌가? '초국가 담론'의 주체는 '초국가적' 자의식을 지닌 엄연한 개인(개체)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임지현의 '강단 초국가주의'를, 김영하는 행동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영역이 접합하는 교육 현장을 국가 시스템이 섬세하게 바꿔나가는 일은 얼마나 쉽지 않을지….



1.

임지현 교수 “국경에 갇힌 국사 패러다임 깨야”

ㆍ임지현 한양대 교수 역사에세이 ‘새로운 세대…’ 펴내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임지현 한양대 교수(50)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지식 사회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을 통해 사회 저변의 ‘인종적 민족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다. 이후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 같은 도발적 이론으로 근대 국민(민족) 국가 체제 문제와 함께 ‘탈민족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이론은 반론·재반론을 거치며 지식 사회 주요 담론으로 자리매김됐다. 그가 주창하고 천착 중인 ‘트랜스 내셔널리즘(초국가주의)’은 자기 부정을 통한 이론의 재정립과 인식 확장 과정에서 나온 대안의 문제 의식이다.

 
임 교수의 신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휴머니스트)를 관통하는 주제도 ‘트랜스 내셔널리즘’이다. 책의 기초가 된 글은 10년 전 ‘우리교육’에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연재한 역사에세이다. 임 교수는 편지 수신 대상을 역사 인물로 바꿔 다시 책을 내놓았다. 국가 검인정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여전하다. “(‘우리교육’에 연재할) 당시 딸이 중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강요받고 있던 역사 교육을 뒤집어엎는 역사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임 교수는 “의무교육에 입각한 근대 교육체제가 조국·민족에 충성하는 민족주의 신도를 만들어내는 근대국가의 성전이라면, 교과서는 사실상 성경이나 마찬가지”라며 “민주화가 되었다지만 국가·민족을 유일한 역사적 행위 주체처럼 기술하는 역사 교육의 형식·내용은 바뀌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지점에서 임 교수는 순수한 민족주의를 강요하는 고정 관념의 역사교과서를 뛰어넘자고 제안한다. 그는 “국사 패러다임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국가의 경계 속에 가두고 질식시킨다”며 “21세기 우리 삶이 처한 문제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국경에 갇힌 우리의 상상력을 민족주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말한다.

임 교수는 베니토 무솔리니·이오시프 스탈린 같은 독재자, 로자 룩셈부르크·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 에드워드 사이드·한나 아렌트 같은 지식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파시즘, 식민주의, 사회주의 문제를 두루 짚고 ‘탈민족’과 ‘초국가’의 문제의식을 강화한다. 한국에서 ‘민족주의’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서구중심주의’도 비판한다. 임 교수는 에드워드 사이드에게서 해답을 구한 듯하다. “사이드는 미국을 동경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청담동과 아이오와 옥수수 밭 중에 어디가 서양이냐고 묻게 했고, 할렘과 왕십리, 여의도와 맨해튼, 청담동과 소호가 맺고 있는 동맹관계를 생각할 수 있게 했다”고 했다. “사이드는 개항 이후 한반도 지식인들의 사유방식을 지배했던 동서양의 이분법을 여지없이 깨뜨렸다”는 평가다. “동양과 서양이 실재하는 지리·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구성되고 만들어진 거라면, 서양을 따라잡겠다는 근대화·서구화·합리화·산업화 등등의 역사 목표 자체가 허상을 좇는 도깨비 놀음”이라고 했다. 그는 “서양 제국에 저항하고 이들을 넘어서기 위한 민족주의 프로젝트조차도 실은 서양 헤게모니를 전제하는 서양의 게임법칙에 충실한 종속변수”라고 말했다.


한·중·일 세나라를 둘러싼 역사교과서 문제는 어떤가. 임 교수는 “트랜스내셔널 역사 사유방식이 아니라 자국 중심의 역사해석이 되다보니 역사가들끼리 서로 팽팽한 평행선을 긋는 경우가 많아 한계가 느껴진다”고 했다. 일각에서 논의되는 ‘동아시아 공동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공동 역사 교과서는 불필요하고 또 위험하기까지 하다”며 “역사는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고 서로 다른 해석과 이해가 공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편지 수신 대상 중에는 박정희와 김일성도 포함됐다. 임 교수는 이전 남북한 냉전 체제 유지 메커니즘과 김일성-박정희의 공생 관계를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관계로 설명한 적이 있다. 책에서 임 교수는 “김일성 추종자는 박정희의 사생아”라고 규정했다. 그는 “(주사파는) 박정희 체제의 교육 유산으로 받아들인 민족주의적 인식 틀 때문에 김일성 추종자가 된 측면이 크다”고 설명했다. 유신정권이 체제 정당화를 위해 민족주의 담론을 적극 활용하면서 극히 국수주의적 방향으로 바뀐 교육사적 전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국민교육헌장 선포, 국기에 대한 맹세 도입 같은 국민의례 강화, 정신문화연구원 설립 등 사상적·문화적으로 강력한 민족주의 드라이브와 함께 유신체제가 정착되었다는 설명이다.

월드컵 거리 응원의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경향에 대해서 물었다. 임 교수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의 국가 경쟁이라는 구도 자체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단정적인 진단은 피했다. 그는 “21세기 들어 월드컵의 응원 패턴은 과거의 무겁고 심각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놀이문화 속에서 민족주의가 시장과 손을 잡고 가볍고 축제적으로 자신을 변신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임 교수는 그간 ‘(탈)민족주의’ 연구를 심화하고 확장시킨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쓰고 있다. 전후 한국, 일본, 폴란드, 독일, 이스라엘에서 ‘역사적 희생자’라는 집단적 자기 인식이 어떻게 민족주의를 강화했는지를 다룬 책이다.



2.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권리는 없는가?
2
010/04/29 23:28 | 김영하 (http://kimyoungha.textcube.com/89)


지난 4월 27일, 창비의 저작권 담당자라는 분으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날아옵니다. 창비가 편찬한 2010학년도 중학교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저의 산문의 일부가 수록되었다는 것, 교과서 수록은 저작권법 제 25조에 따라 학교교육의 목적으로 사용 시 저작권자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하며 추후 문광부가 정한 교과서 사용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받게 된다는 것, 그런데 자습서와 참고서는 교과서와는 달리  저작권자의 게재 허락을 받도록 되어있으니 허락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메일은 저로 하여금 몇 가지 심각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저작권법 25조는 정말 교과서 편찬자들이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어떤 텍스트든 마음대로 갖다쓰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둘째, 만약 그럴 경우, 자신의 저작물이 교과서에 실리기를 원치 않는 저작권자의 자유는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가.
셋째, 국가는 과연 개인의 저작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편집', 혹은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
넷째, 교과서를 편찬하는 영리기업이 국가의 검정을 득한 교재를 출판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저작물을 마음대로 갖다 사용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경우, 일본의 후소샤와 같은 극단적 정치의식을 가진 출판사가 악의적 목적으로 저작물을 짜깁기하여 엉뚱한 맥락에 저작물을 위치시켰을 때, 저작권자는 어떻게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 하에 개정 저작권법 25조를 찾아 살펴보고 저작권 전문 변호사에게 문의해본 결과,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이 국정이든 검정이든 교과서에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지, 저작권 전문 변호사 한 분의 견해에 따르면, 교육 목적으로 저작재산권을 제한하는 25조가 과연 수록을 거부하는 저작권자의 인격적 권리까지 제한하는지는 다퉈볼만한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 부분에 대한 법률적 판단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저작권법 25조의 정신은 국가가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재를 만들 때, 저작권 사용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저작권자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작물에도 분명 공공재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이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저작권법은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지만 저작물을 사회 구성원들이 잘 사용하도록 촉진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작권자가 아예 수록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저는 국어교과서에 제 글이 실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국어교과서들은 시를 제외하고는 원문을 그대로 싣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작가가 추구했던 내적 완결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문학은 문장으로 환원되거나 교과서 '저자'들의 맥락 속으로 폭력적으로 편입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집과 자습서가 만들어지고 결국은 입시 교육의 한 도구가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난도질 당한다는 것, 문제집의 지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에 나올 것이고 출제자는 작품의 주제와 작가의 의도를 물을 테고 학생들이 이 문학작품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를 점수로 측정할 것입니다. 문학은 정확하게 이해받으라고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의 모호함을 대변하기 위해 씌어지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오직 문학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이러니와 도덕적 딜레마로 가득찬 불투명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합니다. 그러나 교과서는, 태생적으로 짜깁기 앤솔로지이며 정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이 이상한 책은 그런 역할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독자가 작품의 원문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읽을 때, 개개 독자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일 뿐, 시험의 점수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제 글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반대합니다. 저는 제 글이 그 글을 읽기 원하는 누군가의 자유의지로 선택되어 그의 골방에서 읽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소박한 신념은 현행법 체계에서는 지켜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국가는, 그리고 국가 검정 체계를 통과한 출판사는 마치 전시동원물자를 징발하듯 마음대로 저작물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창비의 교과서 사업을 담당하신 분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교과서 사업에 처음 진출하는 출판사의 어려움과 미숙함에 대한 소상한 설명하시고 진작에 저작권자에게 알리고 허락을 구하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교과서에 글을 싣지 않겠다는 저의 뜻을 존중하여 2011학년도 교과서에서는 제 글을 뺄 수 있도록 교과서 편찬자들과 협의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되어 지방으로 배송까지 마친 2학기 교과서를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책을 내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이미 찍은 책을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원칙을 접고 그 부분은 양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행법의 개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검인정 체계에서는 특정 출판사가 자신들의 정치의식이나 미의식에 따라 얼마든지 문제가 있는 교과서를 저작권자들의 뜻에 반하여 제작할 수가 있습니다. 정부가 이것을 적절히 걸러낼 수 있을까요? 창비 담당자의 말씀에 따르면 저작권자들은 교과서 편찬안이 검정에 통과할 때까지는 자기 작품이 그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검정에 통과한 이후에야 알게 되고 그때는 이번 제 경우처럼 수정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저는 과연 국가가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같은 좀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교과서를 모든 출판사가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작물은 마음대로 갖다쓰고, 검정 통과까지는 안개에 가려져 있으며, 일단 통과하면 그 출판사는 문제집이나 자습서로 과점적인 이윤을 누리게 됩니다. 출판사들은 검정에 통과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하게 되고 이를 회수하기 위해 결국은 부가적 수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저의 의문은 계속됩니다. 문학 교육을 과연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옳은가요?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요? 아니, 문학이라는 게 교육되어야하는 것인가요?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요?

이번 창비의 사례는 교과서 업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빙산의 일각일 것입니다. 이번 일을 겪는 동안 저는 블랙박스라는 출판사가 이미 몇 년전에 제 소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의 일부를 발췌하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이 교과서의 편찬자들은 소설의 제목조차 "호출"이라고 잘못 표기하여 전국의 일선 고등학교에 배포하였더군요. 이런 교과서도 버젓이 검정에 통과한 것을 볼 때, 과연 국가의 검정체계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저작권법 25조의 지나치게 포괄적인 저작권 제한 조항은 분명 사회적인 공론화와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최소한의 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현행 국가 중심의 문학 교육 체계에도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이제 저는 제 본업인 소설의 세계 속으로 돌아갑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소중한 시간과 힘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만, 과연 그렇게 될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0년 4월 29일 김영하

(* 이후의 논의는 여러분은 문학을 '배우'셨습니까?를 참고할 것)



3.


[만물상] 문학을 죽이는 국어교육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04/2010050402475.html)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에서 시 '앨버트로스'는 시인의 자화상이다. 앨버트로스는 뱃사람이 항해 도중 재미 삼아 잡는 거대한 바닷새다. '갑판 위에 일단 잡아놓기만 하면/ 이 창공의 왕자도 서툴고 수줍어…'라는 시에서 그 새는 세속 도시에 떨어진 시인의 슬픈 영혼이다. 한국에선 문학청년의 영원한 상징 같은 작품이지만 프랑스 학교에선 초등학교 2학년이 외운다. 교사는 "시인이란 순수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조롱받기 쉽다"고만 가르친다. 객관식 시험은 없다. 명시(名詩) 읊기의 즐거움은 프랑스 문학교육의 오랜 전통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우리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다. 어느날 시인을 만난 어느 교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낸 문제 10개를 풀어보라고 내밀었다. "일곱 문제나 틀렸지 뭐야"라며 시인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이라고 시작하는 최승호의 '아마존 수족관'도 2004년 수능 모의고사에 세 문제가 출제됐다. 최승호가 풀어봤더니 빵점이었다. 그는 "나도 생각하지 못한 정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소설가 김영하가 "국어교과서에 내 글이 실리는 것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산문 일부가 검인정 중등교과서에 멋대로 실렸기 때문이다. '교과서 수록 작품은 저작권자 허가 없이 사용 가능하다'는 게 현행 저작권법 25조다.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한 김영하는 자기 글이 국가에 '징발'돼 '입시교육 도구'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제목이 틀린 채 다른 교과서에 실린 내 소설로 만든 문제 5개를 풀어봤더니 2개 맞았다"며 어처구니없어했다.

▶문단에선 '국어교과서가 문학을 죽인다'고 비판한 지 오래됐다. "시에서 '밤'이 나오면 으레 시대의 어둠이 연결되고, '별'이 나오면 이상(理想)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풀이된다"(평론가 이숭원)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문학을 국어과목에서 빼내 전문교사가 가르치자는 의견도 있다. 문학교육의 목적은 문학애호가 양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겨운 국어시간이 즐거운 문학을 '붕어빵' 지식으로 도배하고, 미래 독자들을 쫓아낸다는 게 문단 여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