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메일은 저로 하여금 몇 가지 심각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저작권법 25조는 정말 교과서 편찬자들이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어떤 텍스트든 마음대로 갖다쓰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둘째, 만약 그럴 경우, 자신의 저작물이 교과서에 실리기를 원치 않는 저작권자의 자유는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가.
셋째, 국가는 과연 개인의 저작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편집', 혹은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
넷째, 교과서를 편찬하는 영리기업이 국가의 검정을 득한 교재를 출판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저작물을 마음대로 갖다 사용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경우, 일본의 후소샤와 같은 극단적 정치의식을 가진 출판사가 악의적 목적으로 저작물을 짜깁기하여 엉뚱한 맥락에 저작물을 위치시켰을 때, 저작권자는 어떻게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 하에 개정 저작권법 25조를 찾아 살펴보고 저작권 전문 변호사에게 문의해본 결과,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이 국정이든 검정이든 교과서에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지, 저작권 전문 변호사 한 분의 견해에 따르면, 교육 목적으로 저작재산권을 제한하는 25조가 과연 수록을 거부하는 저작권자의 인격적 권리까지 제한하는지는 다퉈볼만한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 부분에 대한 법률적 판단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저작권법 25조의 정신은 국가가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재를 만들 때, 저작권 사용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저작권자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작물에도 분명 공공재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이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저작권법은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지만 저작물을 사회 구성원들이 잘 사용하도록 촉진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작권자가 아예 수록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저는 국어교과서에 제 글이 실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국어교과서들은 시를 제외하고는 원문을 그대로 싣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작가가 추구했던 내적 완결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문학은 문장으로 환원되거나 교과서 '저자'들의 맥락 속으로 폭력적으로 편입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집과 자습서가 만들어지고 결국은 입시 교육의 한 도구가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난도질 당한다는 것, 문제집의 지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에 나올 것이고 출제자는 작품의 주제와 작가의 의도를 물을 테고 학생들이 이 문학작품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를 점수로 측정할 것입니다. 문학은 정확하게 이해받으라고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의 모호함을 대변하기 위해 씌어지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오직 문학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이러니와 도덕적 딜레마로 가득찬 불투명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합니다. 그러나 교과서는, 태생적으로 짜깁기 앤솔로지이며 정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이 이상한 책은 그런 역할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독자가 작품의 원문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읽을 때, 개개 독자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일 뿐, 시험의 점수로 환원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제 글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반대합니다. 저는 제 글이 그 글을 읽기 원하는 누군가의 자유의지로 선택되어 그의 골방에서 읽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소박한 신념은 현행법 체계에서는 지켜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국가는, 그리고 국가 검정 체계를 통과한 출판사는 마치 전시동원물자를 징발하듯 마음대로 저작물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창비의 교과서 사업을 담당하신 분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교과서 사업에 처음 진출하는 출판사의 어려움과 미숙함에 대한 소상한 설명하시고 진작에 저작권자에게 알리고 허락을 구하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교과서에 글을 싣지 않겠다는 저의 뜻을 존중하여 2011학년도 교과서에서는 제 글을 뺄 수 있도록 교과서 편찬자들과 협의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되어 지방으로 배송까지 마친 2학기 교과서를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책을 내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이미 찍은 책을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원칙을 접고 그 부분은 양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행법의 개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검인정 체계에서는 특정 출판사가 자신들의 정치의식이나 미의식에 따라 얼마든지 문제가 있는 교과서를 저작권자들의 뜻에 반하여 제작할 수가 있습니다. 정부가 이것을 적절히 걸러낼 수 있을까요? 창비 담당자의 말씀에 따르면 저작권자들은 교과서 편찬안이 검정에 통과할 때까지는 자기 작품이 그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검정에 통과한 이후에야 알게 되고 그때는 이번 제 경우처럼 수정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저는 과연 국가가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같은 좀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교과서를 모든 출판사가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작물은 마음대로 갖다쓰고, 검정 통과까지는 안개에 가려져 있으며, 일단 통과하면 그 출판사는 문제집이나 자습서로 과점적인 이윤을 누리게 됩니다. 출판사들은 검정에 통과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하게 되고 이를 회수하기 위해 결국은 부가적 수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저의 의문은 계속됩니다. 문학 교육을 과연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옳은가요?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요? 아니, 문학이라는 게 교육되어야하는 것인가요?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요?
이번 창비의 사례는 교과서 업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빙산의 일각일 것입니다. 이번 일을 겪는 동안 저는 블랙박스라는 출판사가 이미 몇 년전에 제 소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의 일부를 발췌하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이 교과서의 편찬자들은 소설의 제목조차 "호출"이라고 잘못 표기하여 전국의 일선 고등학교에 배포하였더군요. 이런 교과서도 버젓이 검정에 통과한 것을 볼 때, 과연 국가의 검정체계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저작권법 25조의 지나치게 포괄적인 저작권 제한 조항은 분명 사회적인 공론화와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최소한의 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현행 국가 중심의 문학 교육 체계에도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이제 저는 제 본업인 소설의 세계 속으로 돌아갑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소중한 시간과 힘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만, 과연 그렇게 될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