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본 세종시 문제
"우리 그간 잘해왔잖아유~"
1. 국토균형발전 · 지혁균형발전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이루기 힘든 것인지 알겠다. 당시는 어벙하게 받아들였던 2004년 10월 21일 헌재의 ‘관습헌법’ 판결이 얼마나 중대했는지를 이제야 실감한다. 노무현 정권과 소위 ‘좌파’ 정권의 “잃어버린 10년”의 정책들을 바라보는 국가의 보수적 엘리트들의 심경을 행정수도와 세종시라는 키워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행정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그렇다면 억지 논리로 수도이전을 위헌 판결한 헌법재판소를 먼저 비판했어야 한다. 청와대와 국회 및 모든 헌법기관들이 죄다 옮겨간다면 그보다 업무효율이 높아질 수 없다. 폭설과 교통대란, 그에 따른 대통령 훈계 따위도 필요 없고 휴전선의 장사정포도 두렵지 않다. (…) 행정수도가 위헌이 된 이 상황에서 일부 정부부처만 세종시로 이전했을 때의 비효율성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비효율성이 생기게 된 근본이유는 헌재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금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일정부분의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 다행히도, MB가 그토록 염원하는 행정업무의 효율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묘안은 따로 있다. 헌법을 약간 고쳐서 헌재의 이전 판결을 비켜가면 된다. 즉 헌법을 고쳐서 대한민국 수도에 관한 내용을 조정한 뒤 (꼭 서울이 아니어도 된다는 얘기만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세종시를 원래의 행정수도로 건설하면 국토균형발전과 행정업무의 효율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이미 개헌은 올해 정가의 큰 화두 가운데 하나이니까 개헌 자체가 문제될 일은 아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정치권과 지도자의 의지와 철학인 셈이다. [오마이뉴스, 이종필, 1. 12.]
2. 내게 그 ‘관습’이라는 표현은, 우리나라 근대 60년의 신체적 · 무의식적 상흔과 콤플렉스로 느껴진다. 일제식민과 전쟁과 분단의 역사, 그리고 강대국 틈바구니와 냉전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자원을 서울로, 서울로 ‘보내야 했던’ 지난 대한민국의 발전의 시절…. ‘과거에 대한 재현과 애착과 신화화’는 언제나 지배 이데올로기의 감성적 근거가 된다. 문제는 이런 감성적 근거가 과학적 · 철학적 · 이성적 뒷받침을 결여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본질’이 탐구되어야 할 자리에 ‘감성화된 과거’가 버티고 있다. 그런데 페르낭 브로델의 말처럼, "역사를 새로 쓰려는 사회는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정부가 발표한 이번 수정안은 엄밀히 따지면 기러기를 잡자는 게 아니다. 요리방법에 불과하다. 원래 세종시를 건설하고자 한 취지는 수도권 과밀화를 해소하고 국가,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중앙행정기능을 지방으로 이전해 분권의 기틀을 굳건히 한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이런 취지는 정권이 바뀌면서 변질됐다. 우선 ‘기러기를 잡자’는 본질이 사라지고 ‘삶느냐 굽느냐’는 변죽이 쟁점으로 부상했다. 그 결과 국가 균형발전이란 큰 전제는 행정 비효율이라는 공무원들의 업무개념에 묻혔다. 수도권 과밀화 해소는 흐지부지되고 충청도의 발전, 충청도민을 위한 기업도시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낙착이 돼버렸다. [민병욱, 내일신문, 1. 12.]
● 애초 세종시는 수도권이 전 국민의 50% 이상이 거주하며 지나치게 과밀하고 비대해져 국제적 경쟁력이 약화되고, 인력 자본 등 전 국토의 블랙홀 기능을 하여 국토균형발전을 저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 원안이 비효율적이어 수정안이 필요했다면 국가균형발전의 새로운 전략과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세부 내용의 전제 하에서 수정안이 제시됐어야 한다. 그러나 수정안은 지역에 도시를 하나 더 건설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세종시 본래 취지인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토의 균형발전 목적과 취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계현, 내일신문, 1. 12.]
3.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업적주의’, ‘최대강령주의’(maximalism)적 태도에 대해 일정 정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만하다. 홍준표 의원의 인터뷰를 읽고서 다시 한 번 느꼈다. 또 다양한 사회집단들이 중앙권력을 향해 이익집단화가 되어버린 ‘출세주의’의 풍미 또한 지난 정권의 시대적 특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특징들은 지난 정권의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아주 미시적인 수준으로부터 뒤엉킨 사회 전반의 정신적 토양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아주 독특하게, ‘이성적 대화’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불신하고, 쉽게 집단화되는 분위기 말이다.
● "원내대표 1년 동안 내 몸무게가 빠질 살도 없는데 4킬로그램이 빠졌다. 참고 참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 민주당이 1년 동안 워낙 패악질을 많이 했다. 내가 '패악질'이라고 표현한다. 걸핏하면 점거하고, 협상을 하자고 내가 쫒아 다녀도 응하지도 않았다. 난들 왜 170석 가지고 확 밀어붙일 생각이 없었겠나. 밀어붙이면 그 때는 통쾌하지만 그러고 난 뒤에 데미지는 장기적으로 쌓이게 된다. 열린우리당 시절에 자기들이 본회의에서 밀어붙인 사례가 상당히 많다. 그 후유증이 쌓이고 쌓여서 정권을 내줬다. 집권 초기에 밀어붙여달라는 청와대의 요구도 있었지만 나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많이 가진 사람이 양보하는 게 정치다. 우리가 여당이고, 예산도 야당보다는 다소 편하게 운영할 수 있고, 법률도 운영할 수 있는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그 후유증이 지방 선거에서 나타나고 총선에서 나타나고 대선에서 나타난다. 열린우리당이 왜 망했느냐. 소위 진보의 가치를 절대시하고, 상대방을 '차떼기당이다', 그런 식으로 온갖 모멸감을 주면서 여야 관계를 운영했기 때문에 결국 그 데미지가 쌓여서 정권을 잃게 되고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그런걸 잘 알기 때문에 내가 1년 동안은 많이 참고 가진 자가 좀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홍준표, 고성국과의 대담 중, 프레시안, 1. 12.]
● "우리의 좌파나 진보세력도 일종의 최대강령적(maximalist) 경향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최대강령주의라면 가령 마르크스가 1부터 100까지 이야기 했는데 1부터 99까지는 맞지만 100번째가 틀렸다고 이야기하면 “너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독특한 정서입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권력을 잡은 뒤에 나타나는 일종의 난맥상이라고나 할까요.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고 일반사람들이 가진 열망이나 욕망과 그들의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채널이나 적절한 장치들을 제도 내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도덕주의, 차악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의 부재와 최선을 추구하는 로맨티시즘의 관성, 또는 최대강령주의 같은 사유방식들이 다 같이 엉켜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 민주화운동에서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목표를 최대한 실현할 때 그것을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최대강령적 이해(maximalist conceptions)가 지배적이 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실제로 건설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는 최소강령적인(minimalist) 문제의식과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이 현대 대의제민주주의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전환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현재의 정치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운동을 통해서 나타난 이상과 열정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이것을 어떻게 현실로 전환해서 변화를 만들어내느냐는 것이 저의 가장 중심적인 관심사입니다." [임지현, 최장집과의 대담, <전환의 모색> 中]
4. 그리고, 이런 태도는 이명박 정권의 토양으로 그대로 계승된다. 적과 죽어라 싸우는 자는 어느새 적과 꼭 같이 닮아있다. 열린우리당-민주당과 한나라당도 마찬가지고, 노무현과 이명박도 마찬가지다. 또 우리 국민 누구도 이런 적대적 · 이분법적 태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지난 대선 때 이명박을 찍었다고 누군가를 놀리지 말라. 어쩌면 MB를 가장 반대했던 이들이 MB를 찍은 1100만여 명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 왜 이렇게까지 서두르는가? 청계천을 예로 들면서, 야당의 반대를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여당 중진의 발언은 도가 지나치다. 절차를 최우선시하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세종시법과 4대강 살리기에서 드러나는 이명박 정부의 최대 강령주의(maximalism)는 보수주의 논리에 모순되고, 자가당착이며, 그렇게 포화를 퍼붓던 노 정권의 한때 전유물이던 것이다. 집권한 마당에 국민의 표를 의식하지 않겠다는 애국주의는 독설이자 아집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사업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고, 사후 뒷감당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부족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진지한 자기성찰이 절실하다. [강문구, 서울신문, 2009. 12. 1.]
5. 우리 사회의 지나친 국가주도적 · 국가집중적 경향은 지적할 만하다. 국가정치권력이 중앙행정적인 자원을 통해 재벌 · 재계 등의 경제영역, 교육 · 환경 · 지역사회문화 등 사회영역을 ‘동원’하는 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우 이러한 민간영역이 자율성과 자생력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는 구조적 역량이 현저히 뒤떨어진다고 본다. ‘상생 거버넌스’, ‘지역적 거버넌스’라는 말은 아직 ‘말’의 수준에 그칠 뿐이고, ‘관제’와 ‘관치’의 영향은 어디서나 드러난다. 민간영역이 자신들의 ‘철학’과 ‘비전’을 가지지 못한 채(또는 그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그늘(경제학적의 용어로는 ‘거대한 외부성’)에 의존하고 있는 풍토가 조금은 비겁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쨌거나 소위 ‘시장경제’를 끔찍하게 중요시하는 이들은 MB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계획 ․ 목표에 따라 대기업과 명문대 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태에 대해서 과연 비판하고 있을까?
● 관치는 한 마디로 정부가 시장에 불필요하게 간섭하는 것이다. (…) 관치에 따르는 병폐는 무엇인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인데, 이는 거의 필연적이다. 관치란, 달리 표현하면, 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장의 경쟁과 상관없이 특정 산업, 업종, 기업을 시장의 승자로 만들기도 하고 선별적으로 처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정부의 힘을 빌리거나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쉽고 확실하게 돈을 버는 길이 있는 것이고, 시장의 치열한 경쟁에 이겨서 돈을 버는 어렵고 불확실한 방법에만 의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된다. [유정호, 한국논단 2005년 2월 시론 중에서]
● 양측[MB와 박근혜] 모두 간과하는 것이 있다. 신뢰와 원칙이니, 효율과 비효율에 앞서 이 문제는 우리나라 혹은 우리 국민의 미래의 먹을거리와 직결돼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왜 세종시 수정안에 다른 지방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수도권과 충청권 외의 다른 지역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 제대로 쳐다보려고도 않는다. 세종시에 입주할 기업을 찾아내기 위해 총리까지 나서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구와 광주가 얼마나 허탈해하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내로라하는 지방의 광역지방자치단체장들과 지역정치권이 수년간 발로 뛰어다녀도 대기업의 지방국가공단 유치는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세종시에는 불과 몇달 사이에 삼성과 한화, 롯데 등의 굵직굵직한 대기업들이 줄줄이 입주하겠다고 한다. [서명수 기자, 매일신문, 1. 12.]
6. 행정부를 충청권으로 이전하려는 노무현 정권의 목표는 좌절되었다. 행정부를 부분적으로라도 이전할 수 없으며, 대신 관 주도로 민간자원을 끌어들이는 ‘대안’이 가능하다는 게 세종시 수정안의 어정쩡한 함의다. 자유주의자들의 말마따나, 시장경제와 민간영역의 자발적인 성질은 그 운용에 외부권력이 주도적으로 개입되었을 땐 반드시 왜곡되고 굴절되기 마련이다. 정경유착의 신화화된 기억, 그리고 ‘국가-재벌 주도의 박정희 모델’의 역사가 참으로 뿌리 깊구나. 수도권 과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정부가 또 다시 ‘시장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미 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과 심각한 재정부담, 그리고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 김현석 국가경영연구원장= 근원적인 해결방법이 아닌 문제해결 중심의 접근방법을 채택함에 따라 수정안 발표 이후 오히려 세종시 원안고수 의견과 수정안의 당위성에 대한 의견 대립이 악화되는 양상이다. 공공기관의 인위적인 지방분산 정책도 부작용이 더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세종시 문제로 언급조차 하기 어렵다. 공공기관 이전은 고객(기업)들과의 유기적인 협력관계 구축 등 필요성이 있을 때 기관 스스로 판단에 따라 이전토록 해야 한다. 대안마련만 치중하면 지역간 형평성 문제, 대기업 특혜 등 하나의 문제 해결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우려가 있다. 수정안에 대략적인 방향이 제시됐으나 해당지역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자생적 모델의 구체성이 부족하다. 향후 통일을 고려해 서울, 평양, 세종시의 역할 분담 등의 대안 제시도 빠졌다. [조영주 기자, 아시아경제, 1. 12.]
● 반면 강용식 세종시민·관합동위원회 민간위원은 “세종시의 핵심은 정부부처 이전인데, 9부2처2청이 오지 않는 수정안은 수용할 수 없다.”면서 “7년간 이어온 국책사업을 불과 5개월만에 뒤집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도 “이번 수정안은 균형발전보다는 충청권에 만족할 만한 대안을 주는 방안에 불과하다.”면서 “다른 지역에서 혁신도시 등을 추진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앙부처가 없는 상태에서 해외기업이나 기관을 유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행정기관을 내려보내는 게 효율성 측면에서 비용이 적게들고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성삼 건국대 교육공학과 교수는 “특정 지역에 학교를 집중시켜 거주자를 유인한다는 발상은 교육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정부 지침을 통해 특정대학만 세종시에 유치해 지원을 한다면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설영 기자, 서울신문, 1. 12.]
(사진 한겨레신문)
7. 정치적 난맥 때문에 세종시 문제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 요식적으로 ‘결딴’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학계의 영향력이 얼마나 배제되었는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수도 이전을 위해 전문가들의 의견을 얼마나 오랜 기간 수렴했는지도 알아볼 일이지만, 아마 그 과정이 충분히 진중하고 인내심이 있지는 못했을 법 싶다. (노무현이 후보 시절 ‘공약’을 내걸 당시에는 그 연구가 얼마나 진척되어 있던 걸까?) 학계의 연구결과가 정권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철새처럼 바뀌거나, 또는 쟁점사안이 터질 때마다 전문가들의 발언들이 일회적으로 인용되는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학계가 외부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해 꾸준한 연구 성과를 내고, 이러한 성과가 넓은 안목으로 ‘활용’될 수 있는 전체적인 시스템이 마련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까.
● 참여정부는 국토계획 및 정책의 최우선과제를 국토균형발전으로 정하고, 그 수단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이하 행복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 ․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들은 우리나라 미래 국토공간구조에 미칠 파급효과가 크다는 점과 차기 정부에서도 지속과제로 채택될 때 비로소 결실을 볼 수 있는 장기적 추진과제라는 점, 그리고 많은 국가적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신중한 검토와 지속적인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바람직한 정책적 대안은 객관적 자료와 국토공간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기반으로 작성되어야 하며, 정책의 시행에 따른 결과의 예측과 효과를 파악한 후 추진되어야 한다. (…)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정책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국토의 불균형 현상을 진단할 수 있는 지표의 적절한 분석을 통해 국토불균형 현상에 대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불균형에 대한 요인분석을 바탕으로 균형발전을 위한 정책의 목표수준을 정해야 한다. 또한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바람직하고 유효적절한 정책 수립은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국토공간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정책의 시행에 따른 결과를 예측해볼 수 있어야 한다.
행복도시와 혁신도시의 건설은 미래 국토불균형을 다소나마 완화시키는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행복도시와 혁신도시는 향후 심화될 국토불균형에 비하면 그 효과는 매우 미미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또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과 혁신도시의 건설은 결국 수도권의 규제완화로 이어져 오히려 수도권의 인구집중을 가소화시킬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국토불균형을 완화시키고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다양한 균형발전정책의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권 일 · 류상규 충주대 교수, <행정중심복합도시와 혁신도시건설이 국토균형발전에 미치는 영향>, 한국지역개발학회지(2007. 3.) 중에서 발췌]
● 도시 원동력은 프랑스의 ‘그랑파리 도시계획’에서 엿볼 수 있다. (…) 한국 행정부가 여기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국책사업의 진행과정이다. 2007년 6월 프랑스 대통령이 제안한 이 계획은 2008년 4월 유럽 건축가들이 선정됐고, 지난해 4월부터 구상안이 일반 공개 되었다. 사업 여부는 12월 1일 의회에서 찬성 291표(반대 216표)로 가결됐다. 의회 심의까지 3년 가까이 걸린 것이다. 아직도 언제, 어떻게 재정 확보를 하고, 투자 환수를 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구상안 전시 등은 건축가들의 과시의 자리가 아니었다. 건설을 정권임기 내 속행하려고 홍보하는 행정부의 술책도 아니었다. 시민들에게 미래의 신비로운 도시의 삶, 새로운 변화의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사업은 각 분야 학자들의 방법이 제시되고, 지자체간 상호협약을 거쳐 시민들이 공감하는 계획으로 구체화되려면 아직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테오도르 폴 김, 경향신문 2009. 1. 11.]
8. 하나의 ‘도시’를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가. 새로 생길 도시에 대한 MB와 정 총리의 낙관의 근거는 무엇인가. 황무지에 도시를 세우려는 계획에 입주 예정 기업과 대학교 각각이 찬동한 배경은 무엇인가. 설령 “교육과학중심 경제도시”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라 친다더라도, 도시의 ‘지역사회’에 해당하는 충청권의 내분이 여전히 이렇게 심각한데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를 진정한 의미의 지방중심적 발전의 산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중앙정부가 세종시에 대해 내세우는 독일 드레스덴의 예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라는 장밋빛 수사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 과학계에서는 그러나 이들 도시의 성공 배경에는 수백 년의 교육도시 역사와 기업유치 노력 및 지원, 막대한 기초과학 투자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며 성급하게 경제효과만 추구하면 또 하나의 지방산업단지 조성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 드레스덴의 성공에는 역사ㆍ문화적 강점과 과학ㆍ산업적 토양이 발판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작센 주의 주도로 800년 전통을 가진 드레스덴은 동유럽 문화중심지이자 통일 이전부터 화학, 기계 등 전통산업이 발전한 경제 중심지였다. 이런 경제적 요인과 함께 우수한 문화, 생활, 교육여건 등으로 뛰어난 연구기관과 유수의 기업 유치에 성공한 것도 드레스덴이 대표적인 과학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힌다. 디르크 힐버트 드레스덴 시 경제담당 부시장은 드레스덴의 성공 비결로 ▲산업, 연구기관, 대학 등의 조화 ▲문화.예술의 중심지 ▲좋은 거주환경 등을 꼽고 한국의 경우 교육환경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고 평가했다. [헤럴드경제, 1. 11.]
● 도시는 인류의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완성된 문화의 총체적 장소다. 도시는 사회·문화·인구·자연·생태·경제·정치 분야가 균등하게 발전해야 시대에 역행하지 않게 변화한다. 권력자가 정치공약과 경제를 이유로 도시를 건설한다면 그 도시는 변형의 결과일 뿐이다. 도시는 오랜 경험과 지식으로 형성된 기존의 도시에서만 변화한다. 도시는 사회 체제·유형에 따라 변화하는데, 사회를 형성하는 요인은 복잡하고 다양해 별안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봉건제도의 농경사회는 수백년을 거쳐 고대도시 ‘시떼’를 중세도시로 변화시켰다. 전제주의 사회는 엄숙한 고전도시로, 산업주의는 기술근대도시로, 정보·통신 글로벌사회는 메트로폴리탄으로 변화시켰다. [테오도르 폴 김, 경향신문 2009. 1. 11.]
9. '정치'의 토양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시 현란한 말들의 잔치, '국가대사', '삭발', '단식', '기득권', '망국', '목숨을 걸고', 그리고 '국민투표'… 등등의 새삼스럽지도 않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런 절박한 표현들은, 결국 나랏일에 정권의 영향력이 '절박할 정도로' 크고, 중앙정부에 자원이 그만큼 심각히 집중되어 있다는 반증이 될 게다. 결론적으로 이 문제는 수정안의 발표 내용보다도, 정권이 본래 세종시의 건립 취지였던 '지방균형'을 살리는 정책을 어떤 방식으로든 얼마나 획기적으로 단행할 수 있느냐에 대한 판가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흔히 지나치게 '나대시는' 듯 보이는 서경석 목사의 논지는 놀라웠다. (아래에 인용)
●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 서울시장 시절에 수도분할을 반대하면서 “국토균형발전과 수도권 인구분산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은 행정복합도시 건설이 아니라 획기적인 지방분권임”을 강조한 바 있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는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을 백지화하면서 획기적인 지방분권도 함께 실행해야 한다. 세종시를 自足도시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원래의 목표인 국토균형발전과 수도권 인구분산을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충청도민을 위시한 지방민들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동안 획기적인 지방분권을 해야 한다는 정치인, 학자, 시민운동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방분권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는 중앙집권 체제를 지탱하는 기득권세력의 저항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정부여당이 커다란 난관에 빠져 있는 때가 바로 지방분권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나라는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지방분권으로 복지부, 노동부, 환경부 등 생활 부처의 기능이 대부분 지방정부로 이관되면 세종시로 갈 공무원들이 대부분 지방정부로 가게 되어 사실상 행정부처의 세종시 이전은 무의미해진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세종시 논란도 쉽게 정리될 수 있다. 더욱이 자유선진당은 강소국연방제를 주장하여 일찍부터 획기적 지방분권을 당론으로 채택해 왔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번 기회에 강소국연방제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서경석, 업코리아, 1. 4.]
● 행정부처 전부를 옮기려했던 당시의 집권세력에 맞서 한나라당이 '9부2처2청 이전'으로 절충해 합의해 준 사항이다. 중앙행정부처의 일부 지방이전은 행정의 불편과 비효율 차원을 넘어선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국가의지의 표명이자 상징이다. 한나라당이 대선 총선 지방선거 대선경선에서 수십 번도 더 확고하게 국민에게 약속했던 사업이다. 정 총리는 이를 '과거의 정치적 복선' '정치적 신의 이전의 국가대사'라며 원안대로 행정부처를 옮기면 연간 3-5조원이 낭비된다고 했다. 수도를 분할한 독일의 베를린과 본의 거리는 600km인데 비해 서울과 세종시는 120km, 세종시 오송역에서 서울역까지는 40분 거리로 과천청사에 비해 10분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신뢰 및 정책의 일관성과 효율극대화 중 어느 쪽이 국가백년대계에 더 소중한 가치인가. 신뢰를 지키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큰 효율을 가져온다는 반론도 있다. (…) [변상근, 조세일보, 1. 12.]
●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더 직설적이었다. 김 교수는 "수도권 중심 전략, 트리클 다운 이념을 솔직히 고백하라"면서, 한 발 더 나아가 "세종시 폐기안이 나온 더 중요한 것은 수도권 특권층과 기득권층의 대반격"이라며 "수도권 중심주의, 서울공화국주의는 나라가 망해가는 길"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김 교수는 "정부의 세종시 폐기 선언은 지방으로 오려던 기업과 기관들에게 서울로 유턴하라는 신호와 같아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를 추진하던 대구도 발칵 뒤집어졌고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라며 "백약이 무효다. 원안대로 가되 국민적 합의를 통한 개헌으로 다시 행정수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하영 기자, 프레시안, 1. 12.]
이러다 3년 후엔 정말로 나라의 공주님이 되겠다. (사진 한국일보)
10. 마지막. 정운찬 총리는 발표문에서 "세종시 건설은 정치적 신의 문제 이전에 막중한 국가 대사…"라고 운을 뗐고, MB는 발표 직후 "세종시는 순수한 정책 사안"이라며 "정치 현안과 구분해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첫 번째 키워드로 다시 휘귀하는 순간이다. '정치'에 대한 그 무한한 순결주의! 지난 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에 대한 그 무한한 향수! 사회의 제반 영역에서의 민주적 기반의 마련과, 급격히 변화한 산업구조와, 개발국가 패러다임의 한계와, 그리고 '시장자유주의적인' 마인드까지도 다 어디다가 팽개쳤는지, 정부는 막중한 국가 대사를 위해 '일단 따라오라'고 말한다. 좀 성급하지는 않으면 폼이라도 나련만 아주 쫓기는 품이 역력하게 '일단 따라오라'고…. 뭣보다도 나는 아래와 같은 글을 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 정말 밉다. 이 논설위원은 역사를 내려다보면서 오만하게 글을 썼지만, 기실은 스스로가 옛 역사에 사로잡혀 "시대적 · 역사적인 시야"를 상실해버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본다.
●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는 국책사업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야당이 반대한 중요 국책사업은 1968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과 올해 개통 40주년을 맞이하는 경부고속도로가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해 말 한국은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년 동안 주민의 격렬한 반대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을 처리하는 시설의 용지를 찾지 못하고 떠돌았다. 국책 사업에 대한 반대투쟁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거나 정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야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 때와 같은 부끄러운 반대투쟁의 역사를 하나 더 보태지 말고 전체 국익을 위한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동아일보 1월 12일자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