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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artia
Alyosha
2010. 5. 14. 11:46
비극적 실수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이론에서 비극적 파국을 불러오는 주인공의 잘못된 행동
(도이치문학 용어사전 中)
나는 그리스 비극이 자유인의 비극이며, 당함의 비극이 아니라 행함의 비극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주인공이 당하는 고통이 원천적으로 그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지요.
(…) 그리스인들의 비극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비극 속에서 간신들이나 악한들을 즐겨 등장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다가 사악한 타인의 간계나 음모에 말려들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에서는 매우 낯선 상황설정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비극에서는 원칙적으로 비극의 씨앗이 자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 노예의 비극은 비극성의 근거가 자기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의 비극은 비극의 씨앗이 타인 속에 있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에게 자기의 긍지가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이듯이, 자기의 불행 또한 자기에게서 비롯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 비극이 그려 보이는 고통의 내재성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비극적 고통을 초래하는 과오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습니다. (…) 원래 하마르티아란 창을 던질 때 표적을 빗맞추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의 비극도 그의 의도가 현실적 결과와 어긋났던 까닭에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요? 그는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났지만 그 결과 그는 부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불일치, 즉 의도와 결과의 빗나감이야말로 하마르티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인간이 완전한 존재였더라면 아마도 이런 불일치는 생기지 않았겠지요. 완전한 존재에게는 의지와 현실이 언제나 하나로 합일해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향한 동경, 자기를 향한 운동, 곧 자기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요?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밖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사람에게 있음은 언제나 밖에 있음, 곧 자기 밖에 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 밖에 있음이란 단순히 자기로부터의 이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나 밖에 있는 것은 또한 내가 나에게 되돌아가기 위함입니다. 떠나 있지 않은 것은 되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밖에 있음이란 또한 되돌아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밖에 있음을 위해서든 되돌아감을 위해서든 먼저 있어야 할 것은 비어있음입니다. 그 비어 있음 속에서 나는 나와 거리 속에 있고 동시에 그 거리 속에서 나를 향해 초월해갑니다. 그 비어 있음을 가리켜 우리는 인간의 자유라 부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운동을 통틀어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 이 자기거리, 아 지기와의 불일치야말로 하마르티아입니다.
(…) 그리스 비극은 (…) 만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것은 "남에게 대한 격분"을 표현한 예술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스스로의 슬픔"에 대한 성찰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마르티아, 즉 삶의 근원적 불일치에 대한 성찰이었던 것입니다.
(…) 그리스인들의 비극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은 비극 속에서 간신들이나 악한들을 즐겨 등장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다가 사악한 타인의 간계나 음모에 말려들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에서는 매우 낯선 상황설정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비극에서는 원칙적으로 비극의 씨앗이 자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 노예의 비극은 비극성의 근거가 자기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인의 비극은 비극의 씨앗이 타인 속에 있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에게 자기의 긍지가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이듯이, 자기의 불행 또한 자기에게서 비롯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 비극이 그려 보이는 고통의 내재성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비극적 고통을 초래하는 과오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습니다. (…) 원래 하마르티아란 창을 던질 때 표적을 빗맞추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의 비극도 그의 의도가 현실적 결과와 어긋났던 까닭에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요? 그는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났지만 그 결과 그는 부모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불일치, 즉 의도와 결과의 빗나감이야말로 하마르티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인간이 완전한 존재였더라면 아마도 이런 불일치는 생기지 않았겠지요. 완전한 존재에게는 의지와 현실이 언제나 하나로 합일해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향한 동경, 자기를 향한 운동, 곧 자기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요? 왜냐하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밖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사람에게 있음은 언제나 밖에 있음, 곧 자기 밖에 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 밖에 있음이란 단순히 자기로부터의 이탈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나 밖에 있는 것은 또한 내가 나에게 되돌아가기 위함입니다. 떠나 있지 않은 것은 되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밖에 있음이란 또한 되돌아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밖에 있음을 위해서든 되돌아감을 위해서든 먼저 있어야 할 것은 비어있음입니다. 그 비어 있음 속에서 나는 나와 거리 속에 있고 동시에 그 거리 속에서 나를 향해 초월해갑니다. 그 비어 있음을 가리켜 우리는 인간의 자유라 부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운동을 통틀어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 이 자기거리, 아 지기와의 불일치야말로 하마르티아입니다.
(…) 그리스 비극은 (…) 만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것은 "남에게 대한 격분"을 표현한 예술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스스로의 슬픔"에 대한 성찰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마르티아, 즉 삶의 근원적 불일치에 대한 성찰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