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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희생양> 中 2장. '제도와 문화, 상호성'





(…) 집단적 박해란 페스트 창궐 때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처럼 군중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행해진 폭력을 말하며, 집단적 선동의 박해란 그들 나름의 형식에 의거하여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흥분한 여론에 의해 유발된 합법적인 마녀 추방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같은 구별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적 테러에서는 종종 이 두 가지 유형의 박해가 모두 나타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박해는 주로 위기의 시기에 나타나는 박해이다. 위기의 시기는 정규적인 제도가 약화되면서 '군중'들이 쉽게 형성될 수 있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 군중은 그냥 무력한 제도로 변하거나 아니면 그 시대에 결정적인 압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
 
사실 그 실제 원인들이 무엇이든 간에, 박해를 당한 사람들은 언제나 유사한 방식으로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 위기는 거대한 집단적 박해를 낳고 있다. 이때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당연히, 사회적인 것의 근본적 소멸과, 문화적 질서를 규정하는 '차이들'과 규칙의 소멸이다. 이에 대한 묘사들은 모두 유사하다. 우리는 특히 페스트에 대한 묘사를, 투키디데스와 소포클레스에서 루크레스, 보카치오, 셰익스피어, 드 포, 토마스 만을 거쳐서 앙토넹 아르토에 이르는 위대한 작가들의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기록들은 문학적 의도가 없는 개인의 글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기록들은 문학적인 글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사실은 놀랄 만한 게 아니다. 이 텍스트들은 더 이상 차이가 없는 사실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의 무차별화이고 거기서 나오는 혼돈이다.

(…)

제도의 붕괴는 동시에 모든 것에다가 한결같이 괴물 같은 양상을 부여함으로써, 위계 질서와 기능의 차이들을 없애거나 한데 뭉뚱그려버린다. 위기에 처하지 않은 사회에서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현실의 다양성과 '차이를 부여하는' 교환 체계 때문이다. 이 교환 체계는 그것이 당연히 내포하고 있는 상호성의 요인을 감추고 있는데, 만약 그것을 감추지 못할 경우에는 이 교환 체계, 즉 문화는 사라지게 된다. 예컨대 결혼 제도의 교환이나 심지어 소비재의 교환도 거의 교환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있을 때는 교환의 왕복 작용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더 빠른 상호성이 자리잡게 된다. 이런 현상은 생필품에 대한 엄격한 조처 속에서 이루어지는 물물 교환 형태의 생필품의 긍정적인 교환뿐 아니라, 재물을 불리려는 적의의 '부정적인' 교환에서도 나타난다. 말하자면 서로간의 거리가 짧아지면서 드러나는 이런 상호성은 좋은 상호성이 아니라 나쁜 과정의 상호성이다. 이것은 모욕, 구타, 복수와 신경증 증세에서 볼 수 있는 상호성이다. 그래서 전통 문명에서는 이처럼 너무 즉발적인 상호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쁜 상호성은 사람들을 서로 대립시키면서도 행동을 획일화함으로써 '같은 것'이 성행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며 유아독존적인 것이기에, '같은 것'이란 것은 다소 모순된다. 그러므로 무차별화의 경험은 인간 관계 면에서는 실제적인 것과 일치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신화적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사람들은 이 경험을 우주 전체에 투영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르네 지라르, <희생양>, 민음사, 25~2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