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런 은유로서의 사진론: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외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얄팍한 사람들뿐이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오. ― 오스카 와일드, 한 편지에서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을 증명하는 ‘사진’에 대해 말한다. 와일드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은 오로지 고통뿐”이라면, 인류의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세계의 ‘가면’을 벗겨버리는 일도 가능할 터이다. 세계의, 또는 인간의 가면이란 무엇인가. 왜 지극히 문명화된 작금의 세계에서도 인류 최대의 죄악이라는 전쟁이 계속 일어나는가.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고 있는, 또는 조장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가면’은 무엇인가. 손택은 전쟁의 한복판을 ‘방랑자’처럼 영웅적으로(또는 노골적으로) 파고들어가 피사체를 ‘포획’하는 사진들을 통하여, 사진 그 자체가 아닌 전쟁에 관해, 그리고 이 사회에 관하여 분석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13p)이며, 이미지의 세계를 통해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13p)을 시도한다. 결국 손택에게 사진은 하나의 비극적인 은유다. 그리고 그 은유는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내부’에 관한 것이 되리라. 외양과 내부는 결코 따로 떨어진 채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손택은 ‘전쟁사진’의 출현과 시간에 따른 변천양상을 살피고, 사진이라는 매체가 갖는 속성과, 인간에게 ‘고통’이 의미하는 바를 각각 분석한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그 사진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질문한다. 다시 말해, 그녀의 목적은 ‘고통 받지 않는 우리’에게 이미지로 전달되는 ‘고통 받는 타인’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녀의 글쓰기 ‘형식’은, 이러한 과정에서 에두르는 법이 없다. 그녀는 웬만하면 할 말만 하며, 그녀의 단문은 종횡무진을 거듭한다. 손택의 빛나는 두 능력― 풍부한 지성과 예리한 감성은, 건조하고 직선적인 문체와 매혹적으로 섞여 있다. 그러나, 글의 ‘주제’에 관한 한, 그녀는 상당히 에둘러 간다. 그녀는 빠르게 말하면서도 또한 천천히 말한다. 손택은 단문으로 달려나가는 동시에 ‘사진’과 ‘인간’에 관한 성찰을 섬세하게 쌓아가면서 한 편의 에세이를 완성시킨다. 형식과 내용이 상치하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손택의 글쓰기는, 인간과 현실의 내부와 외부, 밝음과 어두움, 긍정과 부정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려는 예술적인 전략에 다름 아니다. 총체적 세계를 분절적으로 ‘해석’하는 사진과, 그 사진을 세계의 총체성으로 다시 복원시키려는 손택의 역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중에서
수전 손택의 말을 빌자면, “오래 전부터 몇몇 사람들은 온 몸으로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다면,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의 포악함과 광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어 왔다.”(33p) 그러나, 분명하게도 그러한 믿음은 21세기에 이르러 거의 풍비박산이 난 셈이다. 전쟁의 참화를 더할 나위 없이 실감나고 요란스럽게 전파하는 보도물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도, 세계의 한편에서는 참혹한 전쟁과 살육이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고통스럽더라도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전쟁은 도저히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그리고 주목을 끄는) 소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77p)는 것을. 인간의 내부에는 고통과 잔혹함을 사랑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일찍이 사드가 냉소했듯, 매일 일어나는 일상과도 같은 살인에는 어떤 열기도 있을 수 없다. TV 브라운관 속의 살인과 죽음에는, 오직 익명의 무가치한 사망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일 <이미지의 진정한 생명력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미셸 세르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시선으로 ‘타인’의 고통을 유통시키는 ‘우리’의 이미지들은, 이미 그 생명력을 철저하게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미지들은 생명력 없이 무한 복제되며, 소리 높여 외치지만 기실 아무것도 전달해주지 않고 있다.
사진에 대한 그녀의 예술적인 은유는, 우리가 사진을 통해 접하는 ‘타인의 고통’을 보다 정당하게 해석할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해석은 예술작품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뒤에,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해석에 반대한다>, 34p) 그녀에 따르면 ‘지금’ 우리의 상황은 이렇다. “우리의 문화는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다. 그 결과, 우리는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해석에 반대한다>, 34p) 손택은 현대사회의 독특한 문화적 특질이 오히려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한다. 그녀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상황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현대 사회의 경험에는 뭔가 희극적인 요소, 즉 신성한 희극이 아니라 악마적인 희극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해석에 반대한다>, 406p) 이러한 ‘악마적인 희극’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손택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해석에 반대한다, 33p)을 배워야 한다고. 그것이 바로 손택이 제시하는, 세계를 은유하는 예술에 필요한 <성애학>이며,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치고 있는 이미지를 접할 때에 가져야 할 <성애학>이다. 그것은 또한 손택이 위대한 이론가로 평가하는 바타이유적인 관점의 성애학(또는 에로티즘)이다. 그리고 “이 관점은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한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150p)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뛰어들 때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과 죽음 앞에는 ‘우리’와 ‘타인’이 없다. 연민과 동정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려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인류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타인의 죽음’에도 용감히 뛰어들어야 하리라. 그것이 손택의 주장이다.
“원폭 반대라는 명목을 내세워 인간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려는 심리가 대중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이상, 나는 역사 따위는 믿고 싶지 않거니와 원폭 반대 캠페인에도 동참할 수 없다.”
―데라야마 슈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중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문명화된 ‘현대’를 믿을 수 있는가. 손택의 주장대로, 현대의 윤리적 감수성은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하려는 확신으로 표현된다. 누구도 이를 쉽게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한 감수성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사진’은, 이중적이면서 문제적인 본질을 지닌다. “상기한다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168p)라는 측면에서 사진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분노를 떠안기지만, 동시에 사진은 “저 멀리 떨어진 채 타인의 고통을 겪어볼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171p)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사진을 넘어서는 우리의 문제다. 우리가 사진―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관조적이거나 정적인 공간>에서 바라볼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한 공간이 바로 정치다. 연민이 타인의 상처를 한순간 어루만져 주는 것이거나, 어쩌면 ‘타인’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러한 연민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평등한 동료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 정치, 다시 말해 공적인 공간을 실제 세계에서 만들어나가야 한다. 수전 손택은 주장한다. 우리가 만약 역사와 인간성을 여전히 믿는다면, 우리는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은유로서의 사진을, 한걸음 뒤로 물러선 채 보다 진지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그것은 타인의 고통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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