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브(snob)
스노브는 ‘속물, 재물 숭배자’라는 뜻으로 원래는 신사인 체하는 속물을 뜻하지만 패션에서의 스노브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려고 값비싼 의상을 입는 자기 과시적인 사람을 말한다. 여피 스타일, 컨템퍼러리룩과 함께 소피스티케이트 스타일에 속한다.그러나 이들은 도시적인 세련된 멋을 지닌다. 1982년에 《슬론 레인저 핸드북》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슬론은 런던의 거리 이름으로 그 주변에 거주하는 중상류층 사람들을 슬론 레인저라 하며, 그들의 스노브 의식을 만족시키는 복장을 슬론 레인저 룩(sloane ranger look)이라 한다. 이 책의 출간 이후 그러한 라이프 스타일이 화제를 모으게 되었다.
이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옷값으로 쓰고 많은 시간을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데 소비하며 의상뿐 아니라 액세서리까지도 최고급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국의 옛귀족이나 1920년대의 부유층 복장에서 영감을 얻은 레트로 스노브(retro snob) 패션을 즐기는데, 전통적이고 부유한 감각인 진품을 지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스노브 그룹은 사치와 향락만을 추구하는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엘레강스와 댄디즘에 대한 동경, 지성과 새로움에 대한 추구 등으로 인생을 보다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앵포르멜(informel)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표현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들여 기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의 이지적인 측면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고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로 나타났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M.타피에는 이러한 경향의 화가들의 그룹전을 기획하고 소책자 《또다른 예술:un art autre》(1952)을 발간, 이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앵포르멜(非定形)이라 했다.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하고 공간이나 마티에르에만 전념함으로써 또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것으로 그것은 기성의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무정형 ·무한정한 자유가 오히려 표현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 포트리에, 뒤뷔페, M.마튜, G.마티외 등이 있으며,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르상티망(ressentiment)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 특히 격정(激情)의 구실을 중시한 F.W.니체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복수감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을 빌면, 그리스도교의 ‘사랑’도 사실은 증오감 ·복수감의 숨겨진 정신적 태도에 지나지 않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실천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것을 상상(想像)의 복수로 갚는 인종(忍從)과 관용(寬容)의 모럴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M.셸러는 근대사회의 시민도덕이나 그 발전형태의 사회주의 사상이야말로 소수지배자에 대한 대중의 르상티망의 결정(結晶)이라고 하여 윤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 이후 이 개념은 사회심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 사회주의를 심리주의적인 동기를 갖는 이론으로서 유행시켰다. 한편, S.보부아르 등에 의하여 그 반동적(反動的) 이데올로기성(性)이 비판되기도 한다.
제노사이드
학살 또는 집단 살해(genocide)는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종족, 인종, 종교, 국가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학살의 정의는 1948년 국제 연합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나온다. 이 협정 2조를 보면 학살을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이다.[1]
CPPCG의 전문에는 역사상 학살의 사례를 들고 있다.[1] 그러나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이 이 용어를 만들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홀로코스트 심판 이후에야 국제 연합은 학살을 국제법에서 규정하는 CPPCG에 동의하였다.
CPPCG가 발효하여 처음으로 해당 조항을 시행하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지금까지 학살로 국제적으로 기소된 르완다 학살,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대하여 임시 국제 재판소에서 맡은 바 있다.[2] 2002년 국제 형사 재판소가 생겨 이 조약을 체결한 모든 국가에 사람들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 기소한 사례가 없다.
1951년 1월 CPPCG가 발효한 이래 국제 연합 약 80개 회원국은 CPPCG 조항을 자국법과 통합하는 입법을 통과하였으며, 일부 학살 범법자가 이러한 자국법에 따라 유죄를 선고받기도 하였다. 가령 니콜라 요르기츠(Nikola Jorgic)는 독일 법정에서 학살 범죄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CPPCG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조약에서 보호하는 집단의 정의가 협소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특히 정치 집단에 대한 정치적 학살(politicide, 어떤 나라의 사법에서는 이 용어는 학살에 포함하기도 한다)에 대해 보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3] 또 기소 판례가 있기까지 이 조약에서 뜻하는 정확한 정의(定意)가 법정에서 적용된 바가 없다는 문제가 있는데, 가령 조약 내용 가운데 "(집단의) 일부"(in part)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살 범법자들이 국제 재판소나 개별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법적인 주장과 해석은 이런 논란을 도와주고 있다.
CPPCG에 대한 다른 비판으로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나온 이 규정이 이미 학살을 저지른 자들을 벌주기 위한 것이라 한발 늦다는 점에서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비판으로 말미암아 2006년 4월 28일 국제연합 안보리 결의안 1674이 채택되어 안보리에서 무장 분쟁 중 민간인을 보호하고, 학살, 전쟁 범죄, 인종 청소,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에서 이들을 지킬 수 있게끔 행동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레고리 스탠튼(Gregory Stanton) 등 학살 연구자들은 희생 집단의 비인간화(dehumanization), 학살 집단의 강력한 조직, 범법자들의 학살 사실 부정 등 학살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조건과 행위를 규정할 수 있으며, 미연에 학살을 방지할 수 있는 행동을 가정하고 있다. 더크 모지스(Dirk Moses) 등 이런 접근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가령 "다르푸르 분쟁은 이곳에 개입하는 강대국들의 결정에 따라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랑키 [Louis Auguste Blanqui, 1805.2.1~1881.1.1] |
퓌지에테니에 출생. 아버지는 프랑스혁명기의 지롱드파(派) 의원, 형은 경제학자였다. 1822년 파리에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리당(黨)에 가입하여 1827년의 카르보나리당 폭동 때 부상을 당했다. 1830년 7월혁명 이래 거의 모든 폭동에 가담하여 생애의 절반 가까운 약 30년간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는 이론가라기보다는 행동가로서 동지를 모아 조직화하고 그들에게 정열을 고취하는 점이 뛰어났다.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을 지녀 점진적 개량을 배격하고 소수의 정예분자에 의한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하였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후의 혼란기에 반란을 지도하여 한때 가(假)정부의 일원이 되었고, 1871년 파리 코뮌 성립 직전에 체포되었다가 1879년에 석방되었다. 그의 극단적인 폭력주의는 ‘블랑키주의’라 불린다. 사후에 출판된 《사회비평 Critique sociale》(2권, 1885) 등의 저서가 있다. |
앙가주망
원래 계약 ·구속의 뜻인데, 정치나 사회문제에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내가 어떤 목적을 향한 구체적 투기(投企)에 있어 나의 자기성(自己性)을 살[生] 때의 존재방식이 앙가주망이며, 이 경우 내가 대자존재(對自存在)이기 때문에, ‘자기구속’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근원적으로 자유인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온갖 어려움에 부딪치고 주위로부터 저항을 받거니와, 이러한 저항에 의해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세계 속에서 구속된 것으로서 밖에는 자유로운 대자(對自)는 존재하지 않고, 이 구속을 별도로 하고서는 자유의 관념은 그 의미를 잃는다는 역설에서야말로 앙가주망의 존재방식을 엿볼 수 있다. 앙가주망이 ‘주관―나’가 아니라 ‘대상―나’, 즉 ‘보는 나’가 아니라 ‘보이는 나’에 적용될 때 자기구속은 하락하여 구속상태, 꼼짝달싹 못할 상태에 빠지고 만다. 이를테면 ‘빚을 져서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라는 표현처럼, 앙가주망이 ‘사회참여’라는 뜻으로 쓰일 경우에는 인간이 미래를 향하여 자기를 구속하는 상태를 말한다.
앙가주망이란 말이 어원적(語源的)으로 가지(gage:내기)에서 온 것처럼, 출발에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투기가 있고, 투기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박이 따른다. 이것을 ‘사회참여’로서 강조한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47)에서 였고, 여기서 사르트르는 또한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외쳤으나, 소설에서는 실패하고 연극에서 겨우 활로를 찾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실천적 활동이 주목할 만한 것으로, 알제리전쟁에 즈음한 반전운동, 베트남전쟁 때 개최한 평화재판 등에서 그의 앙가주망사상을 보다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사고방식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선진국 청년에게 호소하는 힘을 가졌다. 60년대 이후 앙가주망의 유행은 일단 끝났으나 개(個)와 전체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이 시도의 의의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
* 발레리: "질서란 반자연적 기획"
* 레비나스: "신체란 드라마의, 사건의 총체"
* 융: 공동체란 "두목 없는 페니스 주머니"
* 리쿠 라바르트: 아우슈비츠에 만약 신학-정치론적 배경이 있다면 루이 16세의 머리 베기
* 칼 슈미트: 적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정치는 없다
* 줄리안 벡(Julian Beck) - 링크
* 라쿠 라바르트1 (링크)
* 라쿠 라바르트2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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