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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에 대하여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
 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갈겨 쓴 낙서처럼
 인간집단 속으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존재,
 한여름에 흩날리는 눈송이와도 같은 존재,
 그 존재는 현실인가 꿈인가, 좋은가 나쁜가,
 귀중한가 무가치한가?
                                ― 로베르트 무질, <통카>



 먼저 이 점을 기록해두고 싶다. 나는 그의 책을 단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나는 김영하를 아주 좋아한다고. 내가 만약 작가가 된다면 나는 김영하를 꼭 빼닮은 문체를 쓰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안경환 교수가 칼럼에 <검은 꽃>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당시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꽤 거창하고 무게감 있는 글쓰기를 즐겼던 안경환 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검은 꽃>을 읽고서 '근대의 조선', '근대의 대한민국'이 겪어낸 굴욕과 굴종의 역사를 한탄했다고 썼다. 조선이 뭐 별 것 있으랴. 결국 그가 말하려던 것은 조선이라는 허울 뿐이던 국체를 이루고 있던 '사람'의 역사, '사람'의 굴욕으로 점철된 '근대' 아니었으랴.

 김영하는 그 근대적 양상의 벼락 같은 상황을 멕시코 이주 노동자들의 '역사'에서 길어낸다. 마치 역사학의 최근 조류가 점점 더 일상史와 '회색'의 메타포를 강조하는 것처럼, 그는 어떤 추상적인 관념 또는 직선적이거나 환원론적인 어조, 감정이입도 배제하고, 때론 사회사적으로 때론 소설풍으로, 근대 조선의 인간 군상들을 예리하면서도 냉정하고, 객관적이면서도 은근하게 서술해나간다. (김훈과의 연결점)김영하는 자신이 창조한 역사적 인물들을 들쭉날쭉하게 '거리를 재면서' 바라보고, 그 거리의 조절은 예민하며, 그 거리는 대하소설처럼 촌스럽게 가깝지도, 역사교과서처럼 재미없게 멀지도 않다. 나는 이런 김영하의 스타일이 정말 좋다! 남진우의 평처럼, 이런 '거리 재기'에서 비로소 세련된 아이러니가 탄생한다. 남진우는 누구를 인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태도야말로 섣부른 비관주의나 낙관주의에 경도되지 않게 해주는 '근대의 유일한 지혜'일지 모른다."

 "그는 예전의 믿음으로 돌아가 옛날 방식으로 사느니 차라리 가난한 주인의 노예가 되어 흙을 파며 산다든가 또는 다른 끔찍한 일을 견디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소설은 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이정이 물에 처박히는(죽는) 도입. 이정이 죽은 장소는 멕시코와 이웃한 과테말라의 띠깔, 먼 오래 전 마야문명의 자궁 같던 곳. 그러나 죽는 순간 이정이 본 것은 조선, 조선인, 낯익은 제물포의 풍경… 이정은 먼 타지에서, 과테말라의 쿠데타를 도우며, 이상적 공동체를 꿈꾸면서 죽어가지만, 그의 시작은 조선이요 조선인이었을지언정….

 김이정과 이연수의 로맨스는 내 마음도 쿵쾅거리게 하였으니…. 당시에 여전히 산란함과 번잡스러움 속에서 미몽을 핥고 있던 내 혼돈 때문이었으리라. 연수를 묘사하는 작가의 섬세한 필치도 한 몫 했을 테고. 연수. 이정과의 결합에 실패하고, 권용준에게 의탁하나 거기에서 도망치고, 마침내 성실하고 강인한 체질의 퇴역 조선군인 출신인 박정훈과 연을 맺는다. 

 "박정훈이 편지를 전했다. 연수는 처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얘기를 들었으나 편지를 읽고 나선 울었다. 여기 왔었군요. 박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머리를 깎아주고 면도도 해주었소. 연수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았다. 박정훈은 삼 년 후, 이발을 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사했다. 이연수는 박정훈의 돈으로 고리대금업을 시작했다. 몇 년 만에 그녀는 베라크루스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큰손이 되었다. 그녀는 곧 멕시코시티로 올라가 극장을 겸한 술집 몇 개를 사들이고 무희들을 고용했다. 그녀는 유흥가의 거물로 성장해 어떤 자선사업도 벌이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의탁하지 않고, 오직 갈퀴처럼 돈을 긁어들이는 일에만 전념했다. 경찰과 행정당국은 그녀에게 매춘 알선 혐의를 적용하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였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서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모든 유산은 그녀의 아들 박섭이 물려받았다." 나는 이런 아이러니가 너무나 좋다!

 '無를 향한 긴 여정'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남진우의 해설은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소문자로 씌어진 역사("스냅사진"), 근대로 가는 배("melting pot",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예비하는 자궁의 이미지"), 녹색의 금(제목 그대로 '검은꽃'. 또는 남진우가 인용하는 바처럼 I.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이론) , 국가의 탄생(안경환은 바로 이 점에만 집중한 것인데; 그리고 이정의 정치적 고민), 아비찾기(권위싸움;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박광수-바오로의 예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巫의 세계관), 마지막으로 묵시록적 비전과 아이러니적 비전(로망스와 비극과 풍자와, 역설과 유머와 허무주의적 색채), 이렇게 여섯 꼭지로 이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