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 프로그램은 내게 쓸쓸한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연봉 1500만 원 미만의 미혼 직장인 여성들을 위한 시립 임대 아파트는 전국에서 11곳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어제 방송을 탄 서울시립 미혼 여성 임대아파트는 1986년에 구로공단 여공들을 위해 설립되었단다. 25년간 약 30여만 명의 미혼 여성들이 이곳에서 '상경'의 꿈을 키웠다고….
상경을 어떻게 볼 것이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 나오고, 서울 부모 집에서 따끈한 밥 먹고 있는 내가, 간혹 돈 벌러 서울로 올라온 주위의 젊은이들을 낮잡아 보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똑같이 '상경'과 동반한 '계층 상승'을 이루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서울의 나쁘지 않은 한 켠에 집을 마련하고, 아들을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고, 아들은 그 부유한 환경을 누려오지 않았더냐.
가난하지만 열심히, 밝게 살고 있는 내 또래의 20대 여성들을 바라보는 일은 복되었다. 20대의 문화론과 세대론과 같은 말의 잔치들이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발랄한 '여성성'의 담백한 향취가 72시간의 촬영 동안 잘 전해진 것 같다. (내 지론은, "결국은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이 방송은 나를 다시금 좀 더 진지해지게 만들었다.
* [다큐를 말하다] KBS1 <다큐멘터리 3일> 제작기
스무 살의 상경기
- `금남의 아파트' 72시간
방송: 2010년 6월 20일 (일) 밤 10시 25분 KBS 2TV
CP: 박복용
PD: 김영철
글, 구성: 박금란
남성은 절대 들어갈 수 없고, 밤 12시 30분에는 출입이 통제되는
‘금남의 아파트’가 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미혼여성 임대아파트.
남성은 물론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이곳에
우리는 단 3일간의 특별출입을 허락받았다.
20대 미혼 여성들만의 공간, '금남의 아파트'에서 보낸 3일이다.
● 상경의 꿈 키우는 보금자리
지난 1986년 가리봉동 수출 공단의 여성 근로자들을 위해 문을 연 미혼여성 임대아파트.보증금은 일반 자취방 월세 수준인 약 50만 원, 한 달 임대료는 2만 2천원에서 4만 4천원이다. 한 집에 방 두 칸, 2~3명의 여성들이 한 세대를 이루어 살고 있다. 서울시 소재 직장 근무, 만 26세 이하, 연 소득 1천 2백만 원 이하의 입주 자격을 가져야만 거주가 가능하다. 현재 금남의 아파트 주민은 450세대 1075명. 지난 24년 동안 302,785명이 이곳에서 상경의 꿈을 키우고 나갔다.
● 고달픈 서울살이
아파트 여성들의 대부분은 지방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 중이다. 상경한 지 2년째인 정설송 씨(28세)는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하루 한두 끼, 그것도 빵으로 끼니를 대신할 때가 많아 영양실조와 황달에 시달렸다. 그 후 억척스럽게 끼니를 챙겨먹는다고 한다. 이제 혼자 밥 먹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외로움도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 한 달 용돈 4만 원 쓰는 또순이
수입의 90%를 저축하는 이민정 씨(29세). 또순이로 소문난 그녀는 한 달 용돈 4만원으로 버티며 상경한 지 1년 반 만에 1200만원을 모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샀던 옷과 친구에게 얻은 구두로 만족하며 알뜰한 서울살이를 해 나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로 집안 사정이 나빠져 가족이 흩어져 생활 중인 김유라 씨(25세). 4남매의 맏딸인 그녀는 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고 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했었지만, 지금은 부모님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난다는 효녀이다.
아플 때 돌봐 줄 사람 없는 현실에 서럽기도 하고
마주 할 사람 없는 밥상에서 가족 생각이 간절해지는 그녀들.
저마다의 꿈을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는
요즘 20대 같지 않은 ‘장한 딸들’의 상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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