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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유혹

인사이더(The Insider): 언론 윤리에 관한 160분짜리 보고서







"당신은 말만 하면 되지만, 나는 나의 가족을 포함해 모든 걸 걸어야 하지 않소."

어눌하지만 줏대있는 과학자 제프리 와이건(러셀 크로우)은 로웰(알 파치노)에게 토로한다. 로웰은 TV 탐사보도 프로그램의 효시라 불리는 CBS <60 minutes>의 PD. 와이건은 미국 3대 담배회사 중 하나인 '브라운 & 윌리엄슨'의 부사장으로 일하다가 해고된 인물이다. 그는 회사로부터 자신이 아는 진실을 말하지 말 것을 협박받으면서도 로웰과 접촉하고, 결국 <60 minutes>를 녹화하며 법원의 함구명령을 어긴다. 법에 의거한 계약상으로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순간, 그는 인사이더(내부고발자), 다른 말로는 딥스로트(Deep Throat) 혹은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가 되어버린다. 자, 이제 와이건과 로웰의 문제는 '윤리적 지평'으로 넘어온 셈이다.
 
윤리는 그 둘을 보호할 수 있을까? 여느 사회적인 문제와도 마찬가지로, 윤리적 쟁점에는 다양한 심급들이 존재한다. 취재원 개인의 문제, 취재원과 언론(방송)사의 문제, 언론(방송)인 개인의 문제, 방송사 내부의 문제, 방송사와 거대기업과의 문제 등. 그러나, 그것은 '윤리'라는 외연을 지니므로,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더욱 치열하고 깊은 고민과 갈등을 내포한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곧 실제의 도덕 규범이 되는 원리"라는 뜻풀이를 지니는 윤리의 문제이기에. '말'로 도덕 군자가 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무거운 법이다. 한 개인에게 지나친 윤리적 준칙의 렌즈를 들이대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며, 그래서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 법률적 장치들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개인의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한 사회에 살고 있으며, 그 결단들이 모여서 제도와 법률을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어쩌면, <윤리가 아예 필요없는 유토피아적인 사회> 또한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발언은 가려서 하고, 가려서 들어야 할 것이다.)

"좌파 기자"로부터 CBS의 간판 PD가 되어서도, 사회 비리를 캐는 열정을 잊지 않은 로웰. 그는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에, CBS를 떠나 PBS의 특파원으로 부임하고, 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와이건은 일자리를 잃은 뒤 고등학교에서 일본어와 화학을 가르치는데, 1996년에는 '올해의 교사' 상을 수상했다고. 참, 둘 다 실존 인물이고, 영화는 실화를 다루고 있다. 와이건이 인터뷰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로웰과 대화하던 중, 로웰에게 "자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언론인이 되었군"이라고 농담을 던지던 장면이 있었다. 5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이혼을 겪은 로웰. 그는 언론인으로서 취재와 '진실'에 집착하는 자신이 어느 정도는 "병적"이라는 걸 인정하는데, 그래도 그에게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주름을 지닌 아내가 있었다. 로웰과 와이프와 그 자식들의 관계는 정말 이상적이었다. 그러니깐 내가 부러워 한 씬은 이런 거였다. 침대에서 신문을 보는 남편과, 남편 옆에서 전화 통화를 하는 아내. 아내에게 무언가 궁금한 자료에 대해 묻는 남편. 그걸 읽어본 후 "음, 잘 모르겠는 걸?"이라고 대답하는 아내. 아이들은 그 둘에게 다가와서 인사하고 웃으면서 학교에 가는 장면. 음, 말로 설명하려니 잘 안 되는군.

클로즈업, 특히 빅 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되었고, 진중하고 대체적으로 '슬로우'한 화면들에 맞추어 음악들은 장중하고, 무거웠다. 마이클 만 감독은 TV와 영화계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명감독인데, <히트>와 <에비게이터>도 챙겨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와이건이 해고되는 걸 아내에게 말하는 순간, 또 와이건이 법을 어겨야 하는 그 순간에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의료보험과 병원비는?"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도 특기해놔야겠다.


관련 자료 링크들

* 인사이더와 리크게이트 (심영대) : '내부고발자' 관련 언론법제 간략히 정리됨

* '딥 스로트' 보호법? (유희준) : 최근 미국의 '딥 스로트' 사례
 
* 밥은 굶을지언정 할 말은 할 수 있겠어? (박호열) : 주로 한국언론을 비판하는 논조의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