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너무나 굳센 나머지 실망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허무주의적인 세기말에도 그는 긍정적이었다. 질병과 죽음에도 역시. 왜 나는 과거에 그에 대해서 떠벌렸던가? 그는 웃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여기 있다. 슬퍼하는 건 너야, 멍청아. 그가 말한다." (들뢰즈의 죽음 이후 『르몽드』에 실린 리오타르의 추도문)
들뢰즈에 대해 그 자신의 발언을 제외하고, 이렇게나 그와 그의 사유를 잘 표현한 말이 있었던가? 긍정적 삶의 대가였던 들뢰즈는 그 어떤 '부정적인 것의 긍정성'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그냥 부정적인 것일뿐 그로부터 긍정적인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좋아하는 '반성'을 엄청나게 경멸한다. 반성은 우리를 위축시킬 뿐이다!
들뢰즈는 '글쓰기' 그 자체에 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형식의 글쓰기 실험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이해'할 수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밤 고원 위에서 별 밭을 우러르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을 때 그의 저서 중 아무 곳이나 펴 놓고 읽어 보길 바란다. 말들의 미로 속에서 오바이트하거나, 오만가지로 펼쳐지는 생각의 잔치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린비 출판사, <철학 vs 철학> 소개 중에서)
이제는 들뢰즈를 읽을 때가 되었다. 수유-너머에 다시 놀러가 볼까? 그린비 출판사 블로그에 들렀다가 어느 열여덟 소녀(김해완 님)가 열심히 공부하고 글도 쓰고 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감동했다. 그러면서, 또, 마음이 허전해졌다.
"행복해지는 건 의무"라고 했던가. 삶을 뿌리채 긍정하는 일은 왜 이렇게 쉽지 않은가. 이제는 들뢰즈를 읽을 때가 되었다.
웃자, 고통이여. 웃자, 슬픔이여.
(…) 몰리에르적 삶의 밑바닥에는 어쩌면 비극이 있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그 너머로 나아간다. 자기 삶의 비극적 자장 속에 타자를 끌어들여 함께 함몰시키지 않고, 그 함몰을 자기만이 견뎌내야 할 몫으로 받아내면서 타자에겐 그 자신의 삶을 살도록 되돌려 놓아주려는 몰리에르는 깊은 웃음을 창조해낸다. 그 웃음은 비극을 크게 감싸안으려는, 저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삶의 장(場)을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사랑의 소산이다. 몰리에르의 그러한 감싸안음은, 마침내 삶이 스스로 모든 고통을 비워내고 순수한 축제 공간으로 화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단지 상상을 통해서일망정.
이인성, <축제를 향한 희극>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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