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안무가 출신의 롭 마샬 감독은 <게이샤의 추억>을 찍은 후 일찍부터 <나인>을 뮤지컬 영화로 각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시카고>의 브로드웨이적 뮤지컬 스타일은 그대로지만, <시카고>와 달리 <나인>에서 원작을 각색한 결과는 헐겁고 억지스러운 느낌이었다. 음악과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기대 이하였다. 그렇다고 영상이 탁월했던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브로드웨이 대극장 스타일의 연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매력적이었다. 영국 국립극단의 경력을 지녀서인지, 그의 연기에서는 연극적인 냄새가 강하게 느껴진다. 행동과 대사의 선은 굵으면서도 감정의 선은 섬세하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보면서도 무언가 불편하고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무언가 연출의 과잉된 '전시'의 흔적이랄까, 연출적인 자의식의 개입이랄까, 두 영화에서 그런 점을 느꼈다.
여하간 이런 생각을 품고, 펠리니의 <8과 1/2>을 보았는데, 영화사적인 "대가"의 고전적 작품을 직접 찾아본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1963년 작품. 펠리니의 "여덟번째 반"의 작품. 이 흑백필름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왜 요즘의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영화사'를 훑고 고전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지 실감됐다.
영감으로 움직이는 예술가의 전형을 확인한 듯하다. 정말이지 대단했다. 그의 미장센에는 여유가 넘치고, 관객이나 평론가를 의식하지 않는 듯한 자신감이 있다. 니노 리타의 장중하면서도 위트 있는 음악은 영화에 편안히 녹아들어 있다. 펠리니는 배우를 전적으로 무지한 존재로 간주하고, 이 영화를 찍을 때에도 평생의 벗으로 생각했던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구이도 역)를 제외한 어떤 배우에게도 영화의 내용과 스토리에 관해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기계적이고 아마추어적인' 배우의 역할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가 우러나올 수 있다는 펠리니의 신념. 그리고 완전히 즉흥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대담하고 개방적이었던 그의 작업방식. 언제나 쫓기며 살던, 규칙이 없으면 무엇도 할 수 없는 어린이와 같던 그의 성격. (왕가위와 닮은 점이 많다…. 그의 평전을 보며 드는 생각들.)
마지막의 스펙터클한 원무(圓舞), 그리고 아내에 대한 구이도의 담담한 고백(펠리니 자신의 심경이 분명한)이 맞물린 시퀀스는 내게 편안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만 나를 받아줘. 그것이 우리가 자신을 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꺼야. 당신의 정직한 눈을 부끄러움 없이 바라볼 수 있을까…"
구이도의 아내 루이자로 분한 아누크 에메는 아름다웠고, 지성적인 동시에 여성적인 느낌으로 영화를 잔잔히 빛냈다. <나인>의 루이자, 마리옹 꼬띠아르 또한 참 아름다웠으나, <나인>은 그녀의 캐릭터를 단순하고 상투적으로 바꾸어버렸다. <배우 출신의 아내, 감독인 남편에 대한 회한, 여성성의 억압….> 펠리니의 자기혼란의 즉흥성과 대담성이 헐리우드의 상투적인 캐릭터화와 만나는 지점. <위대한 흥행작 이후 "개박살"난 작품들을 만들고 영감의 고갈에 괴로워하는 천재 감독>, <기자들의 천박한 영화저널리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요부에 대한 동경> 등등…. 1960년대 작품 안의 영감을 현실적으로 전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영감들이 하나의 줄기로 연결되지 못한 채 제각기 폐쇄적인 상투성에 그치고 마는 게 문제가 아닐까. <나인>이 바로 그런 텍스트는 아니었을지. 뮤지컬 영화 역대 최고 제작비라는 딱지가 안타까웠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을 보고 자기 소설을 망쳐놨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저승의 펠리니도 <나인>을 봤더라면 쿤데라와 꼭 같은 심경이 되진 않았을까. 여담이지만, 평전에서 쿤데라는 펠리니를 자기 자신을 뛰어넘은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하고 있었다.
'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 디 에어 In The Air (0) | 2010.03.29 |
---|---|
여자는 여자다(une femme est une femme) (0) | 2010.03.02 |
뷰티풀 마인드 (0) | 2009.11.21 |
<좋지 아니한家>와 <동감> (07.12.21.) (0) | 2009.11.14 |
워낭소리 (09.05.06) (0) | 2009.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