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도서관 세미나, 첫 발제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맡았다. (9월 22일) 내가 다수를 휘어잡는 성격이라기보단, (모택동이 그러했다고 하는데) 소수의 모임에 강한 '스터디형 인간'인 것은 맞는 듯한데, 하도 오랜만에 이런 자리(나까지 포함, 10명)에서 발제를 맡으니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차분해지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배 한 명이 프롬의 '자유'를 물으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의 감옥'격의 얘기를 하고 나의 코멘트를 바랐을 때에 제대로 코멘트해주지 못한 점은 후회로 남는다.
발제 후 토론이 <사랑의 기술>과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의 이 저술로 이어지는 사랑의 철학-정신분석학-사회학 부문으로 이어졌다면 좋았을 터인데, 아쉽게도 지나치게 미시적인('동성애') 부분과 거시적인('혁명') 부분을 얘기하다가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려서…. <사랑은 지독한…>은 지난 해에도 읽다가 멈춰둔 상태였는데, 이번에 지나친 속독으로나마 다 읽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이런 매력적인, 사회학 저술을 이렇듯 급하게 나 혼자 읽고 땡친다는 건 참으로 억울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책으로 맘 맞고 성실한 이들과 한 세 달 일정으로 독서 세미나를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21세기 초엽, 한국현실에는 또 얼마나 벡 부부의 논점을 증명해줄 (또는 한국적 상황으로 나름 특수하게 반박할) 사례들이 얼마나 많을까?
부부의 공동저술이자 여섯 챕터로 이루어지고, 또 '공동'으로 작업했다고는 하지만 서로의 글쓰기를 웬만하면 터치하지 않은 듯해 챕터마다 논조가 중복되는 부분이 꽤 많았지만, 그렇듯 자연스러운 반복 때문에 오히려 주제가 선명하게 스케치되는 측면이 있다. 주제는? 현대인의 '사랑'은 현대사회에 사는 개개인을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 및 변화양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현대인의 사랑은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고, 위태롭고, 역설적이고, 그러나 여전히 매혹적이라는 것.
프롬의 건설적인 진술에서 휴머니즘적 또는 종교적 '아우라'를 싹 제거하고, 건조하고 냉정하지만 세심한 눈초리로 현대사회의 '사랑'을 바라본 저술이 바로 벡 부부의 <사랑은 지독한…>이라 할 만하다. 내게 나중에 사회학 책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런 벡 부부의 장황할 만큼 풍성하고, 문학-예술적이며, '시크'한 글쓰기가 하나의 전범이 될 것이다.
얼마나 시크하길래? : 간단하게 메모해 둔 부분들만 메모해둔다.
"직업 시장은 직장인들이 가족의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가족은 이와 정반대의 것을 원한다. 만약 시장경제가 철저하게 관철된다면 어떤 가족적 결속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경제적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라도 회사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상태로 있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속에 방해받지 않는 개인이 이상적인 직장인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경제 사회는 궁극적으로 무자녀 사회이다. 아니면 아이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독신 아버지나 독신 어머니와 함께 자라야 하는 것이다."(76)
그래서, 이런 충돌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로이 계획하고 결정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개인주의 논리가 들어선다. 즉 경제적 단위로서의 가족은 점점 붕괴되고 노동 시장과 개인에게 의존하는 새로운 생계 방식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일자리를 찾는 방식은 시장의 법칙 - 예컨대 유연성과 이동성, 경쟁과 경력 같은 - 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러한 법칙은 사적 헌신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법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직장과 수입, 사회적 지위에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105)
<과잉공급된 선택지를 갖고 살아가기>(Riesman, 1981)는 현대인을 특징짓는 하나의 속성이자, <현대가 자제공한 자유는 '위험천만한 기회'>(Keupp, 1983)라는 것. 자유의 역설!
다시 반복하자면,
"현대적 삶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논리는 외톨이를 전제하고 있다(Gravenhorst, 1983). 시장 경제는 가족, 부모되기, 파트너 관계에 대한 욕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노동 시장이 아주 유연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시장을 앞세워 가정 파탄을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얼마나 시원스런 문장이냐?). 결혼이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고 남자는 바깥에서 일을 한다'와 동의어인 이상 일과 가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은폐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부부가 가사도 나누어 맡아야 하게 되자 이러한 사실이 커다란 소동을 일으키며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시장 논리에 따라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파트너들을 라이벌과 개체로 만들어 현대 생활에서 좋은 것을 놓고 서로 경쟁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252)
해결 방안, 또는 더 나은 '사랑'을 위한 구상은 있는가?
"이것은 아주 사회민주적이고 아주 혁명적인 어떤 것을 최고 의제로 올려놓는다. 우리는 노동을 소득과 분리시켜야 한다. 부유해진 사회라면 적어도 이전의 모든 사회와 시대에서 비롯된 명령을 포기하는 것을 꿈꾸어야 하며, 생존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 유일한 출구는 산업 사회의 전체 구조를 다시 생각해 만족스러운 사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고려할 수 있도록 이 구조를 재조직하고 성 장벽을 넘어 새로운 균형을 찾는 방법뿐이다. (…) 기업과 정부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빈말만 늘어놓지 말고 여러 조직을 포괄하는 협력적 고용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실제로 가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공헌해야 할 것이다. (…) 사람들은 다시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어떤 규칙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어떤 지침도 없으며, 따라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은 관련 당사자들에 의해 합의되어야 한다. (…) 우정과 같은 재미없는 개념도 부활되어야 한다. 사랑처럼 매혹적이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생각을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추구되는, 따라서 더 오래 지속되는 신뢰할 만한 파트너 관계로서의 우정 말이다." (281-284)
그러니, 근본적으로 위험하고 불확실한 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시대와 사회에서, 사랑이 '신흥 종교'로 떠오르고 있다는 울리히 벡의 문학적이고 익살스러운 마지막 챕터를 읽어보자.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을 뜻한다"(가브리엘 마르셀) 우리네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외로우며 연약한지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이 빛나는 희망은 그만큼 더 즐겁고 매혹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사랑은 연애 소설을 응용해서 읽는 것이고, 팝송에 나오는 대로 사는 것이며, 개인의 삶을 치유해 주는 자아의 철학이기도 하다… 참된 사랑은 드물고 희귀한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개인화된 사회에서 커다란 매력을 갖게 되었다… 살로메가 지적하듯이 천 배나 증폭된 외로움 속에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랑은 자신의 메아리에 귀기울임으로써 세상에 달랑 나 홀로 있다는 느낌을 극복하려고 한다. 다시 일상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만이 다시 외로워지는 것을 늦출 수 있는 유일한 치유책이다… 즉 가깝고도 먼 사랑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을 위한 외로움이다…"
그래서 21세기에는 '사랑없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이를 어쩌나? '사랑'의 <달콤한 낭만성>이 싹 사라진 시대가 기어코 도래하려나? 근대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완전한 개인'이라는 관념을 탄생시켰다. 그 '완전한 개인 프로젝트'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거쳐, 훗날 <사랑>과 <가족>이란 전통적 관념이 없어진 세계에서 끝내 완성되리라. 책 말미에서 벡 부부가 씁쓸하게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은 섬뜩하지만 '분명한' 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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