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철학입문수업 발제 교재로 썼던 책.
같은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대담>을 읽고, 다시금 펴들어보았다.
* 휴머니스트의 책들, 찾아 읽어볼 것. 좋은 기획.
나름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깊은 내공을 쌓은 두 학자의 대화를 몇 년만에 접하면서, 나는 참괴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었을 시절은, 내가 만 스무살이었을 때.
심리적 · 실존적 고민으로 힘겹게 방황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삶의 많은 '길'이 열려있었던, 그야말로 '청춘'의 시절.
그렇게 이제 5년을 보낸 나는 <학문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와버렸는가?
지난 5년간 한 점의 후회 없이 성실하게 대학 생활을 했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외국어. 서양 원전은 반드시 서양어로 읽어야 한다는 두 학자의 말.
영어 하나로도 버거워했고, 몇 년간 <Moby Dick> 한 권 시원스레 독파하지 못했던 나.
내가 머리가 나쁜 걸까. 불성실했던 걸까. 외국어 학습이야말로 한 사람의 학생의 성실성을 측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외국어 실력의 진짜 기준은 토론할 때 말의 주도권을 갖느냐 못 갖느냐입니다 (…) 배워만 가지고는 안 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죠."(김용석)
이런 조언을, 내가 학부 시절 유학의 경험이 없었다는 변명으로 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학문을 하려는 이들은 좀더 원대한 구상을 가지고, 기초적으로 필요한 언어부터 하나씩 익혀가는 대기만성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이승환)
일단 발등에 떨어진 취업문이지만, 만약 본격적인 취업을 내년도에 하게 된다면, 그 때엔 내게 주어진 20대의 마지막격의 '배움의 시간'에는, 외국어 공부에 참으로 힘을 쏟아야 하리라. 어차피 나는 평생 <학자의 자세>로 살려 하지 않는가. 이 말은 입술에 올리는 그 자체로 나를 설레게 만든다.
"철학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철학자란 계속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죠. (…) 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끊임없이 준비하는 자세로 학문을 하는 것이죠. (…) 그러니까 학자는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는 준비의 과정이 기다림 그 자체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김용석)
이 책을 입문수업 교재로 활용했던 김용헌 교수님. 지금도 그 의도가 십분 이해가 가고, 그때에도 어렴풋하게 대학 초년생에게 이 책이 주는 의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즐겁게 하는 구절들.
"내용물은 과학 ·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옵니다. (…) 창조력과 비판력을 갖춘 지성인의 모습…"(이)
"학생들의 기본적인 자질을 키워주는 곳 (…)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지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곳 (…) 총체적 사회 적응 능력을 키워준다는 (…) 논리적 사고, 치밀함, 그리고 감수성이야말로 대학에서 반드시 습득해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기본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나갔을 때 어느 분야든 적응해서 창조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김)
나는 어땠나?
어느 정도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왜, 왜 조금 더 밀고나아가서, 나를 버리고, 나를 벗겨버리고, 더 괴로워하고, 더 외로워하고, 더 고통스러워하지 못했을까.
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있지 못했을까. 왜!
앞으로도(바로 이 순간부터) 정말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본론(동서양 철학간의 본격적인 토론)부는 상당히 아쉽게 느껴졌다. 자꾸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 토론의 질이 풍성하게 고양되지 못하는 느낌. 물론 이건 대담집 자체가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겠다. 서로 다른 전공을 하는 두 학자간의 '핀트'를 완벽하게 맞추는 일이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그것을 세심하게 맞추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전반적으로 <대담>에 비해서 훨씬 조악하게 삐그덕거리는 토론이었던 듯싶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아서 <대담>을 기획 · 출간한 듯. 김용석이 근대철학을 넘어서는 문화와 일상 영역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설명을 시도하지만, 이승환은 서양의 근대 자체에 대한 문제만을 내내 제기하며 동양철학에 대한 일반론적 옹호만을 펼칠 뿐. '서양'을 '학계의 외부자'격인 김용석이 담당하고, '동양'을 한국 학계의 풍토에 분노(과히 그랬다)하는 이승환이 담당하니, 그 구도가 번번이 빗나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
김용석의 '총체성->총체성(보편) 아래의 열림->총체성 없는 보편성(열림이 아닌 '엶')' 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나름의 시대구분은 신선했다. 열린 보편성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혼합되는 지점'이라고. 세 번째 단꼐 이전까지는 정체성의 기준이 주로 나라나 민족에 있으며, 국가의 특징은 '집단적 이기주의가 허용되는 최소 단위'라고. 그리고 흥미로운 개념화는, "총체성 없는 보편성에서는 정체성의 기본 단위가 하강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 "정체성이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의 문제, 즉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문제가 된다는 것"이라고. 카스텔스를 비롯한 여러 사회학자의 논의. 그리고 부족화와 신체주의, 몸담론, 일상사회학, 마페졸리 등등의 논의.
"부끄러워 하는 태도는 당연한 것이다."(피에르 쌍소) 한국의 부끄러워하는 정서, 수줍어하는 정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조니 미첼의 노래처럼 프랑스에선 대로변에서 키스를 한다지만, 우리가 그에 머뭇거리는 정서 또한 나름의 가치 있는 것은 아닌가? "기계론 대신 동양은 생기주의(生氣主義)예요. 유기체적이죠. 동양에서는 만물유정(萬物有情)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인간 간의 세밀한 감정을 얼마나 중시합니까."(이) 인간 간의 세밀한 감정을 중시하는 에토스의 긍정적 · 부정적 성격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 '남의 눈치를 보는'(감정과 눈치 사이의 뉘앙쓰는 또 얼마나 미묘한가!) 태도가 지니는, 다분히 수직적이고 집단주의적 · 가족주의적 폐단과 연결된 현실. 인간 욕망의 표출에 대한 혐오의 무의식적 태도. 한국의 현실이 워낙 피폐해서 어쩔 수 없다! "다른 인간을 바라볼 때도 환원론이나 기계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기에 살아서 숨쉬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타자를 '구체적'으로 바라보려 한 것이죠."(이) 만약 한국의 '수줍음'의 정서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금욕주의적 정서와는 결합하면 안 되겠다. 예컨대 개신교의 윤리? 둘이 결합하면, 남는 건, 비굴함과 비겁함,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부끄러워하는 태도 등등밖에 남는 것이 없진 않을 터인가?
* 바로 이와 관련하여,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포스팅 참고할 것
대학 1학년 철학입문수업 발제 교재로 썼던 책.
같은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대담>을 읽고, 다시금 펴들어보았다.
* 휴머니스트의 책들, 찾아 읽어볼 것. 좋은 기획.
나름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깊은 내공을 쌓은 두 학자의 대화를 몇 년만에 접하면서, 나는 참괴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 책을 읽었을 시절은, 내가 만 스무살이었을 때.
심리적 · 실존적 고민으로 힘겹게 방황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삶의 많은 '길'이 열려있었던, 그야말로 '청춘'의 시절.
그렇게 이제 5년을 보낸 나는 <학문의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와버렸는가?
지난 5년간 한 점의 후회 없이 성실하게 대학 생활을 했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외국어. 서양 원전은 반드시 서양어로 읽어야 한다는 두 학자의 말.
영어 하나로도 버거워했고, 몇 년간 <Moby Dick> 한 권 시원스레 독파하지 못했던 나.
내가 머리가 나쁜 걸까. 불성실했던 걸까. 외국어 학습이야말로 한 사람의 학생의 성실성을 측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척도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외국어 실력의 진짜 기준은 토론할 때 말의 주도권을 갖느냐 못 갖느냐입니다 (…) 배워만 가지고는 안 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거죠."(김용석)
이런 조언을, 내가 학부 시절 유학의 경험이 없었다는 변명으로 무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학문을 하려는 이들은 좀더 원대한 구상을 가지고, 기초적으로 필요한 언어부터 하나씩 익혀가는 대기만성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이승환)
일단 발등에 떨어진 취업문이지만, 만약 본격적인 취업을 내년도에 하게 된다면, 그 때엔 내게 주어진 20대의 마지막격의 '배움의 시간'에는, 외국어 공부에 참으로 힘을 쏟아야 하리라. 어차피 나는 평생 <학자의 자세>로 살려 하지 않는가. 이 말은 입술에 올리는 그 자체로 나를 설레게 만든다.
"철학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철학자란 계속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죠. (…) 왜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끊임없이 준비하는 자세로 학문을 하는 것이죠. (…) 그러니까 학자는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는 준비의 과정이 기다림 그 자체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김용석)
이 책을 입문수업 교재로 활용했던 김용헌 교수님. 지금도 그 의도가 십분 이해가 가고, 그때에도 어렴풋하게 대학 초년생에게 이 책이 주는 의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즐겁게 하는 구절들.
"내용물은 과학 ·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인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옵니다. (…) 창조력과 비판력을 갖춘 지성인의 모습…"(이)
"학생들의 기본적인 자질을 키워주는 곳 (…)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지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곳 (…) 총체적 사회 적응 능력을 키워준다는 (…) 논리적 사고, 치밀함, 그리고 감수성이야말로 대학에서 반드시 습득해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기본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나갔을 때 어느 분야든 적응해서 창조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김)
나는 어땠나?
어느 정도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왜, 왜 조금 더 밀고나아가서, 나를 버리고, 나를 벗겨버리고, 더 괴로워하고, 더 외로워하고, 더 고통스러워하지 못했을까.
더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있지 못했을까. 왜!
앞으로도(바로 이 순간부터) 정말 경계하고 경계할 일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책의 본론(동서양 철학간의 본격적인 토론)부는 상당히 아쉽게 느껴졌다. 자꾸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 토론의 질이 풍성하게 고양되지 못하는 느낌. 물론 이건 대담집 자체가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겠다. 서로 다른 전공을 하는 두 학자간의 '핀트'를 완벽하게 맞추는 일이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그것을 세심하게 맞추어가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전반적으로 <대담>에 비해서 훨씬 조악하게 삐그덕거리는 토론이었던 듯싶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이런저런 피드백을 받아서 <대담>을 기획 · 출간한 듯. 김용석이 근대철학을 넘어서는 문화와 일상 영역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설명을 시도하지만, 이승환은 서양의 근대 자체에 대한 문제만을 내내 제기하며 동양철학에 대한 일반론적 옹호만을 펼칠 뿐. '서양'을 '학계의 외부자'격인 김용석이 담당하고, '동양'을 한국 학계의 풍토에 분노(과히 그랬다)하는 이승환이 담당하니, 그 구도가 번번이 빗나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
김용석의 '총체성->총체성(보편) 아래의 열림->총체성 없는 보편성(열림이 아닌 '엶')' 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나름의 시대구분은 신선했다. 열린 보편성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혼합되는 지점'이라고. 세 번째 단꼐 이전까지는 정체성의 기준이 주로 나라나 민족에 있으며, 국가의 특징은 '집단적 이기주의가 허용되는 최소 단위'라고. 그리고 흥미로운 개념화는, "총체성 없는 보편성에서는 정체성의 기본 단위가 하강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 "정체성이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의 문제, 즉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문제가 된다는 것"이라고. 카스텔스를 비롯한 여러 사회학자의 논의. 그리고 부족화와 신체주의, 몸담론, 일상사회학, 마페졸리 등등의 논의.
"부끄러워 하는 태도는 당연한 것이다."(피에르 쌍소) 한국의 부끄러워하는 정서, 수줍어하는 정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조니 미첼의 노래처럼 프랑스에선 대로변에서 키스를 한다지만, 우리가 그에 머뭇거리는 정서 또한 나름의 가치 있는 것은 아닌가? "기계론 대신 동양은 생기주의(生氣主義)예요. 유기체적이죠. 동양에서는 만물유정(萬物有情)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인간 간의 세밀한 감정을 얼마나 중시합니까."(이) 인간 간의 세밀한 감정을 중시하는 에토스의 긍정적 · 부정적 성격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 그런 '남의 눈치를 보는'(감정과 눈치 사이의 뉘앙쓰는 또 얼마나 미묘한가!) 태도가 지니는, 다분히 수직적이고 집단주의적 · 가족주의적 폐단과 연결된 현실. 인간 욕망의 표출에 대한 혐오의 무의식적 태도. 한국의 현실이 워낙 피폐해서 어쩔 수 없다! "다른 인간을 바라볼 때도 환원론이나 기계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여기에 살아서 숨쉬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타자를 '구체적'으로 바라보려 한 것이죠."(이) 만약 한국의 '수줍음'의 정서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금욕주의적 정서와는 결합하면 안 되겠다. 예컨대 개신교의 윤리? 둘이 결합하면, 남는 건, 비굴함과 비겁함,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을 부끄러워하는 태도 등등밖에 남는 것이 없진 않을 터인가?
* 바로 이와 관련하여,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포스팅 참고할 것
"근대 서구의 지식 체계에는 '역사적 평가'라는 게 결여되어 있습니다. 역사 전통을 부정한 게 근대성이거든요. 나는 새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창조자다, 반란자다…. 이것이 근대성의 특징이잖아요. 역사를 통해 전체를 보는 안목을 가지고,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지구와 우주를 한눈에 바라보면서 학문을 해야 비로소 인간과 자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거지요."(이)
역사를 거세한 채 진행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정치적(<인권, 그 위선의 역사>)으로든, 경제적(<사회발전론> 텍스트들)으로든.
"몸담론의 진짜는 지행합일에 있다고 (…) 몸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진짜 몸으로 보여주고 그때 나오는 행위가 '아름다울' 때 상당수 젊은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가르침이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몸의 진정한 철학적 · 도덕적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요? 지행합일이 이루어진 어떤 사람의 몸과 삶 속에서 그 몸의 움직임을 보면 미학적인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동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절로 오지요."(김)
군대에서 재밌게 읽었던 김용석의 철학에세이집. 제대 후 읽고 감탄했던 비보이에 관한 그의 칼럼. 이 분의 글들도 한 번 모아놓고 공부해볼 만하다. 몸담론. 이런저런 스님들의 향취. 조 변호사의 일화들.
"저는 한국 인문학의 문제가 '예술성'의 결여에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에 웬 예술성이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문학에서는 이론이라는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을 말합니다."(김)
인문학이든, 한 사람의 삶이든, '예술성'이 갖는 의의.
취직을 하든 못하든, 내년 2월,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이제 나의 '예열기'는 끝난 것이리라.
그 때부터는 어떻게든―아마 준비가 덜 되었다면 정말 비비적거리고 뒤집어지고 배배 몸을 꼬고 고생하면서―,
내 '작품'들을 만들어가는 나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서두르지는 말고, 천천히.
'책갈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로스와 문명 - 허버트 마르쿠제 (1) | 2009.10.04 |
---|---|
제인 에어 Jane Eyer (0) | 2009.10.03 |
사랑은 지독한 ―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 혼란 (0) | 2009.09.23 |
대담 - 도정일 · 최재천 (0) | 2009.09.19 |
순진함의 유혹 - 파스칼 브뤼크네르 (0) | 2009.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