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묻자면─ 한국은 선진국인가, 아닌가? 이 물음부터가 (우리는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았다는) "인정"에 대한 갈망을 전제하고 있는데, 사회의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강박적 질문 덕택에 우리가 이만큼 '발전'(그들의 의미에서는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질문에 대해선 여러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서에는 '선진국'에 걸맞을 만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없다는 측면을 늘상 지적하고 싶었다. 자긍이 없는 '비굴의 문화'라고 할까. 리영희 선생님이 <대화>에서 인용하신 맹자의 격언처럼, "사람이 남의 엄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업신여긴 연후에 남이 업신여긴다. 어느 가문이 기울 때에는 그 가문의 형제들이 밖에서의 업신여김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이 스스로 그런 후에 남이 자기 가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먼저 그 백성이 스스로의 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그 연후 남이 그 나라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나는 리영희 선생님처럼 우리나라 국민의 민주주의적 정서에 대해서, 여전히 독립적 사고방식과 자립정신이 부족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과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는 것 같다고 힘주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문화적 정서'에 스며들어 있는 그 은근한 '비굴감'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심을 갖고 있다. 비굴(卑屈)의 사전적 정의는 '용기나 줏대가 없이 남에게 잘 굽힘'이다.
마침 얼마전 조선일보의 이진석 경제부 정책팀장이 <'선진화'에 대한 어느 불만>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조선데스크, 2월 18일 기사) 이진석 기자는 "'선진화'라는 용어는 30년 전 한국에는 어울리고, 필요한 단어였겠지만 지금은 어딘가 이상한 말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인 나라에서 "우리는 후진적이라 선진화를 해야 한다"고 매일 노래를 부른다면 과연 합당한 일일까"라고 물은 후, 벤쿠버 올림픽과 오바마의 한국 교육 · 원자력정책 언급, 삼성전자, 그리고 현대자동차를 배우려는 도요타자동차 등을 예로 들며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우리가 선진국이 됐다는 건 물론 아니다. 절대 자만해서도 안 된다. 다만 이제는 우리도 '선진국 따라하기'가 모든 문제의 해답이 아닌 수준 정도는 됐다는 말이다."
결국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명제에 따라서… 우리의 '경제구조'가 지니고 있는 '대외의존성', 그리고 그 의존이 사회적 정서로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서 정리해보았으면 했는데 지금껏 게으름을 피웠다. 예전에 관련 기사 스크랩해놓은 게 몇 개 있기는 하다. 우리는 얼마나 대외(특히 미국)'의존'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또 지금도 그러한가에 대해서. 강대국에 의존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결국은 <의존성>이라는 키워드로.
그러나 내가 더 깊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심정("집단무의식")을 규정하고 있는 의존성이다. 동양적 정서와 서양적 정서의 차이라고 말하면 너무 성근 단순화이겠지만, 어쨌거나 길게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로마의 '덕virtue'의 에토스로부터 시작되는 남성적인 정서와 그러한 에토스가 동양에서는 발흥되지 못한 측면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대담 중 어느 독일 사회학자가 일본은 "근원적으로 여성들이 지배하는, 여성적인 나라"라고 지적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명시적으로는 여성이 남성에게 상당히 종속되어 있는 역사와 문화임에도(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심층적으로는 사회에 '여성적인' 성격이 강화되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여기서 '여성적인'이라는 특성은 '관계성 · 연결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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