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성적 욕망의 표출을 부끄러워 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에로스와 욕망>을 몇 년만에 집어들다. 지난 에리히 프롬 과제 때도 참고하려다가 못한 책이었는데, 읽고 나니 시원시원하다. 특히 참고할 글귀들:
"그러나 희소성과 미숙성에 의하여 정당시되던 억제로부터 개인을 해방할 수 있는 가능성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확립된 지배의 질서가 해체되지 않도록 억제를 유지하고 원활하게 하려는 욕구도 더욱 많아진다 (…) 신화의 병적인 낭만주의는 엄격한 의미에서 현실주의이다." [문명의 변증법 중]
"니체는 유한한 것들이 바로 있는 그대로 구체성과 유한성을 지닌 채 영원히 회귀하는 것을 직시한다. 이것은 일체의 도피와 부정을 물리치는, 삶의 본능들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다. 영원회귀는 필연과 만족이 일치하는 존재를 향한 에로스적 태도의 의지이며 환상이다. (…) 에로스에 근거한 프로이트의 존재 해명은 에로스의 억압적 승화가 아니라 에로스의 자유로운 자기발전으로 문화를 상상한 플라톤 철학의 초기단계를 탈환한다." [철학적 간주곡 중]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화해는 모든 사람의 풍요한 생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의 적절한 질문은 과잉억압이 제거될 수 있을 만한 정도로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문명상태를 충실하게 합리적으로 마음 속에 그려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 진정한 문명은 가스나 증기나 회전무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죄의 자국이 감소되는 데에 있다. ― 이것이 수행원칙의 지배를 넘어선 진보의 정의이다." [환상과 유토피아 중]
"모든 것이 자신 안에 가능성으로서 자기존재의 친밀한 조화를 지니고 있다. (…) 이러한 언어의 풍토는 '원죄의 흔적을 감소시키는 것' ―노고와 지배와 극기에 토대한 문화에 대한 반항이다. 오르페우스와 나르키소스의 이미지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화해시킨다. 그들은 조종되거나 지배되지 않고 해방된 세계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오르페우스와 나르키소스의 이미지 중]
"쉴러의 개념의 폭발적인 성격은 (…) 도덕을 감성의 근거 위에 확립하려고 한다. 이성의 법칙은 반드시 감각의 관심과 화해되어야 한다. 쉴러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폐기하고' 존재와 생성, 변화성과 동일성을 화해시키는 능력을 자유로운 놀이충동에 돌렸다." [미학적 차원 중]
"신경증과 승화의 차이는 확실히 현상의 사회적인 양상에 달려 있다. 신경증은 고립시키고 승화는 결합한다. 승화 안에서는 집이건 공동체건 도구이건 새로운 무엇이 창조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무엇은 집단 안에서 집단의 용도를 위해서 창조된다. (…) 에로스와 아가페는 결국 하나이며 같다 ― 에로스가 아가페인 것은 아니지만 아가페는 에로스이다 ― 는 개념은 2천 년의 신학사를 거치고 난 현재에 와서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 에로스의 문화 건설 능력은 억압 없는 승화이다. (…) 희소성과 소외를 정복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은 다형의 성적 흥분의 회복이다. 변경된 사회조건은 일을 놀이로 변형시키기 위한 본능의 기초를 창조한다." [성욕에서 에로스로 중]
"죽음의 본능과 죄책감의 깊은 관계…" [에로스와 타나토스 중]
그의 철학이 68혁명을 추종하는 젊은이들(신좌파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은 듯. 아주 명민하면서도 호방하게, 세계를 전복시켜 바라볼 것을 주장하는 마르쿠제. 언젠가 시간이 나면 우리집에 있는 <理性과 革命>부터 천천히 들춰보고 싶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시마와 일본의 전공투간의 토론도 어쩌면 마르쿠제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듯. 이를테면 '시간'에 대한 논의. 또,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는 소설 <69>의 구호. 그리고 에리히 프롬에 대한 마르쿠제의 비판. 신프로이트주의, 또는 수정주의라고 가파르게 비판하더라. 수정주의와 같은 태도처럼 "인간의 열망들과 그것들의 충족이 '더 높은 자기'로 내면화되고 승화되면, 사회문제들은 주로 정신의 문제들이 되고, 그것들의 해결은 도덕의 과제가 된다."
지금은 어떻게 바라다봐야 하나? 프롬에 대한 마르쿠제의 비판은 대개 정당한 듯 보이나, 정당한 만큼 '혁명적'으로 보이나…. 세계는 결국 인간 대 인간의 '구체적인' 관계로부터 변해갈 수 없지 않나? 이것이 영화 <몽상가들>의 교훈, 맞나?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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