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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흐름

옛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조선일보 3월 4일자 종이신문이 있어 뒤적거리다가 적는다.


1. 강은교의 글, <아름다운 사람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3/2010030302041.html)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는
자식들 반대에도 한 장애인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 했다…
생활보호 대상자인 그녀에게 쌀과 옷을 주면
오히려 자신이 행복하다 했다…
처음 속 시원히 얘기했다고
택시값 안받는 그를 보며 사랑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 여자를 잊을 수 없다.

남항에 정박 중인 배의 불빛들이 마치 긴 머리핀같이 보이던 송도의 바다, 보랏빛으로 걸어오는 저물녘 바다가 그 깊은 눈을 가늘게 흘겨 뜰 때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살포시 켜지던 배들의 불빛, 하루 한 번씩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점등식을 하곤 하던 건너편 영도의 불빛들. 낙타의 등같이 두 개의 육봉이 솟아있던 앞바다의 섬, 배들을 안고 멀리서 가슴을 내밀고 있던 수평선….

그때 현관 쪽에서 똑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저녁에 누굴까' 하며 문을 여니, 윗집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손에 무엇인가, 국그릇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릇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자갈치에 갔다가 하도 싱싱해서 가자미 한 마리를 사왔어요. 국 같은 것은 혼자 끓이시기 어려워 잘 잡숫지 못할 것 같아 갖고 왔는데, 한 번 맛보세요. 미역에 가자미를 넣고 끓인 것이랍니다. 서울과는 좀 맛이 다를 거예요…." 그 여자는 국그릇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엔 또 작은 접시가 놓여 있었다. 바다 나물이에요. 미더덕을 조금 넣어봤죠. 향취가 있을 거예요." 나는 좀 놀랐지만 쟁반을 받아들었다."이런 것을 다 주시다니… 잘 먹겠습니다."

국을 다 가져다주다니, 나는 정말 그날 저녁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삿날 같은 때 떡 돌리는 것쯤이야 많이 경험한 바이지만 국과 나물이라니. 아무튼 나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감동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 후에도 그 아주머니는 "이런 건 혼자 못 잡수실 것 같아서"하는, 독특한 하이소프라노의 음성과 함께 문을 똑똑 두드리곤 위층으로 얼른 올라가 버리곤 했다. 그 후에 조금 형편이 나은 아파트(그러니까 조금 평수가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여자도 잊을 수 없다.

이 여사. 이 여사는 산복도로에서 형편없이 작은 가게를 하는 분이었다. '푸른 슈퍼'였던가? 부산에는 유난히 골목이 많고 산복도로가 많다. 아마도 바닷가 언덕에 집들이 빼곡히 차 있기 때문이리라. 가끔 무슨 일 때문엔가 이 여사를 만나면 "시장하시지요?" 하면서 다 늦은 저녁에 밥을 안치기도 하던 이 여사. 특히 그녀가 늘 나를 잡아끌고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던 작고 어두컴컴한 안방. 그러나 그 어느 곳보다 따뜻하던 아랫목(그 따뜻한 온기는 추운 날이면 지금도 슬며시 다가오곤 한다).

그때 나는 집안일 때문에 골치가 아플 때였는데, 그녀는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하고, 가게를 잠가놓고 나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아, 참, 그녀가 나에게 워드 프로세서와 컴퓨터를 처음 챙겨주었었지' 하는 생각이 지금 난다. 그랬다. 어느새 나는 그녀가 그때 '골치 아픈 일'들을 나서서 해결해주면서 "교수님께 이건 꼭 필요하실 것 같아서…" 하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녀의 목소리도 독특했었다. 마치 송도 바다에 부는 바람소리같이 낮으면서도 힘있던 묘한 목소리, 내가 때 없이 전화를 걸어도 싫증 내는 기색 하나 없이 금방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이 전화 속에서 울리곤 하던 그 목소리.

그 남자도 잊을 수 없다.

저물녘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거의 파김치가 되어 탄 택시. 나이도 지긋하게 보이던 그 택시 기사.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주 어려운 질문만 아니라면요."

그는 주뼛주뼛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한 여자를 사귀고 있는데, 그녀는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비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장애자라고 했다. "그래서 저는 쌀, 반찬거리를 사주기도 하고, 옷을 사다 주기도 해요"라고 그 기사는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데 옷을 사들고 가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옷뿐이 아니에요. 무얼 주면 그렇게 행복하답니다. 일찍이 그런 경험은 없었어요. 그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이 나이에 택시를 한답니다. 그래서 결혼하려고 하는데 자식들이 결사반대한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 택시 기사는 그날 나의 돈을 받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생전 처음 했는데, 하고 보니 마음이 너무나 시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잘 들어주었다는 것이 택시비를 안 받는 이유였다. 아무튼 그날, 나는 정말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그 택시 기사의 질문을 다시 나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란 동정인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민이 이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게 '사랑이란 뭘까'의 답인가? 그렇지만 사랑은 결코 동정이 아니라고 나의 '지극히 현대적인 자아(自我)'는 주장하고 있었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따뜻한 편지 한 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도 접고/ 가장 따뜻한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졸시, '저물녘의 노래'. 시집 '어느 별에서의 하루'에 수록)




아름다운 에세이다. 하지만 나는 불편하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을 묘사하는 시인의 말에 공감할 수 없다. 나는 저 나직하고 잔잔한 에세이가, 말하자면, 싫다. 왜냐하면 교수 직함을 달고 있는 시인은, 아마도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나의 예감 때문이다. 나는 방금 '아마도'라는 부사의 위치에 '결단코'라는 단어를 넣었다가 지웠다. 그래. 내가 결단코, 라고 말하는 건 무리일 게다. 

그럼에도 난 시인이 주변 이웃에게 가자미 한 마리를 미역에 넣고 끓여 잔잔한 기쁨을 선사한다거나, 주위 사람들의 '골치 아픈 일'들을 시간을 내어 해결해줄 수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내 생각에는, 시인은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시인은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그것을 한갓 언어로, 시인의 말대로라면 '아름다운 사람'들은 거의 읽지 않을 시적 언어로 옮겨적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언어를 시인은 조선일보에 기고한다. 그 기고에 대해, 명예와 금전이라는 돋보기를 들이대면 구차하리라. 어쨌거나 시인은 글 말미에서 "지극히 현대적인 자아"라고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안전한 지위를 획득한다. 나는 그 당연한 깎아내림(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높임)이 싫다. 그런 글이라면 장영희 교수의 유고들로 충분하다.

현대(근대)적인 지식인의 전형을, '남의 말을 끊임없이 훔쳐적는' 운명이라고 고백했던 이는 까뮈였던가. 자신이 되지 못할 '아름다운 사람'의 인간형을, 아름답게 훔쳐적는 시인에게 나는 화가 난다. 지금 내 마음속에는 회의주의가 가득하다. 나는 이 세계의 구조를, 물질적 기반을, 에세이의 자연스러운 관습적 법칙을,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 시인의 '아름다움 예찬'을 인정할 수 없다.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미자(윤정희)가 상징하듯, 진정한 아름다움은 현실에서 끝내 너덜너덜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가? 난 시인의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없다. 내 마음은 사나워져있다.






2. 박은주 엔터테인먼트 부장의 칼럼, [태평로] 10대 낙태 막아 출산 늘리겠다는 건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3/2010030301987.html)

10대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나온 정부의 10대 미혼모지원 대책…
미혼모 양산되면 감당할 수 있나

보건복지가족부는 최근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을 발표, 불법 낙태시술을 하는 병원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정부로서는 법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책에서 눈길을 끈 대목은 따로 있었다.

정부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저소득층 10대 미혼모·미혼부에게 월 12만4000원의 지원금을 주겠다고 했다. 정부는 또 임신한 청소년이 학업을 마칠 수 있게 하고, 연간 154만원의 졸업 검정고시(檢定考試) 학원비도 지원하겠다고 했다.

뭔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정부가 나서 청소년 미혼모(母), 미혼부(父)를 보살피겠다는 것은 태아의 생명권을 어떤 권리보다 우위에 놓겠다거나, 청소년의 성(性)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철학적 결단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 같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落胎) 병원 고발에 자극받아 '정부도 뒷짐지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싶었거나, 방법이야 어떻든 인구만 늘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책임하다.

출산율 감소는 큰 문제다. 시급히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출산의 질(質)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머릿수'만 늘리는 정책이 과연 국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 부모 가정(부모 중 한 사람뿐인 가정)에 편견을 갖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여부와 인성(人性)은 부모가 다 있느냐에 달렸다기보다는 그 자신 삶의 태도에 더 영향받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통계적으로 한 부모 가정 출신이 경제적으로 더 취약하고, 범죄에 더 쉽게 노출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부가 나서 한 부모 가정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건 박수칠 일이지만, 인구를 늘리려고 미혼모가 양산(量産)될 수 있는 정책을 편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10여년 전의 그런 사회가 아니다. 1978년 방송됐던 '청춘의 덫'은 혼전(婚前) 동거와 임신을 다뤘다는 이유로 중도하차했다. 1995년 드라마 '사랑과 결혼'은 비디오를 보던 약혼녀의 손이 남자의 허벅지에 놓여 있었다는 이유로 방송위원회 경고를 받았다. 권위주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사회나 청소년에 미칠 파장 앞에선 '재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지나면서 대중(大衆)은 빠르게 '재미'의 편으로 기울었다. 모르는 남녀가 옥탑방에서 동거(同居)를 한다는 인터넷 소설 '옥탑방 고양이'가 TV 드라마로 선보인 이후, 방송·영화계는 '당당한 10대 미혼모' '쿨한 동거담(談)'을 발굴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이제는 혼전 임신과 동거 얘기가 마치 당연한 얘기, 상식처럼 돼가고 있다. 공영방송 연예 프로그램까지 연예인들의 혼전 임신을 일상(日常)처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초등학생조차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세태(世態)다.

혼전 임신이 별 문제가 아닌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상태에서 정부가 낙태를 막으면 갈 길은 하나뿐이다. 10대 청소년 미혼모, 미혼부가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지금 남미의 많은 나라들처럼. 우리가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미국에선 10대의 '순결서약(純潔誓約)' 논의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순결서약한 청소년들의 피임기구 사용률이 더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순결서약 운동을 추진해온 단체들은 연구결과가 좌파의 논리라고 반발하지만, 미국 정부가 그간 막대한 국가 예산을 쏟아부은 만큼의 효과는 거둘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도덕 교육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낙태 비난보다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여건 조성이 시급하다'는 식의 여성계 주장도 이제는 더 구체화돼야 한다. 우리 아들, 딸들이 직접 부딪히고 있는 문제를 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한 해 34만건에 달하는 낙태 중 1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금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면 이 비율은 앞으로 계속 올라갈 것이다. 언젠가는 이 문제가 남의 나라 얘기, 남의 집 얘기만은 아닌 상황이 올 수 있다. 10대 임신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10대의 에너지를 어떻게 건강한 방향으로 이끌지 진짜 고민해야 할 때다.




나는 이런 글에 분노한다. 미혼모 지원 대책이 미혼모 양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논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글쓴이에 의하면, 찜찜하다는 거다. 철학적 결단도 아닌 것 같고, 마치 '출산율'을 높이는 대책 같아서 의심스럽다는 게다. 그래서 그 대책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자신이  '무책임성'을 근거로 이 성적 무질서의 세태를 마음껏 조롱한다. 우리 아들 딸들이 부딪히고 있는 문제를 진짜 고민하자는 말도 잊지 않는다.

글쓴이가 이 글에서 주장하는 바가 뭔가? 지원을 끊자는 건가? '재미'를 추구하는 게 좋다는 건가, 나쁘다는 건가? 10대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떻다는 건가? 뭘 어떻게 고민하자는 건가? 현란하게 글을 썼지만, 뭣 하나 제대로 주장하는 바도 없이, 의도적인 흐리멍텅함으로 가득한 이런 칼럼. 그런데 그녀의 6월 4일자 칼럼, <온 국민의 합작품 '○○녀' 놀이>를 봐도 이런 물타기는 비슷하다. '온 국민의 합작품'이라니! 온 국민을 비판하는 저 오만한 자세. 수사(修辭)의 역설도 가지가지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크레타인의 역설이 떠오른다. 뻔뻔하다.

'○○녀' 세대는 '남자는 반장, 여자는 부반장' 식의 남녀차별 문화를 아예 모르고 자란 세대다. 그들에게는 험악한 입을 갖는 것도 그저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솔직한 표현이 곧 저질 취향이라는 나쁜 학습을 저질 매체로부터 배운 이 세대에게는 '꽃 같은'이란 말보다 '○ 같은'이란 말이 더 친근하다. 차별에 진력이 난 그들의 어머니 세대는 '여자가 굳이 남자의 나쁜 점까지 배울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스승도 마찬가지였다. 동세대 여성들에게 피해의식을 느끼는 또래 남성들은 인터넷에 ○○녀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면서 '사이버 앙갚음'을 한다. 학부모로서만 '올인'했지 어른으로서 책임의식은 없는 어버이 세대는 남의 자식들에게만 '장유유서'를 훈계한다. 이런 식이라면, 20대 여성의 몰상식한 행동을 카메라로 찍어 공개하고, 그걸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느끼는 '○○녀 놀이'는 이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03/2010060300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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