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나 거인을 배우로 기용한 데라야마 슈지의 작품은 연극적인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였다. 그 중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데라야마 슈지가 만든 실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어머니와 아들이 식사하는 장면이었는데, 갑자기 벽이 사라진다. 모자(母子)는 거리에 노출된 상태로 식사에 열중한다. 도시 한 복판에서 사람들의 이목에 상관치 않고 식사를 하는 어머니와 아들. 이 상징적인 장면에서 나는 데라야마 슈지의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자신이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라야마 슈지의 실험정신은 절박한 생존욕구였던 것이다.
─ 김윤미(극작가)의 글 중에서 <낭독의 힘 2010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 및 심포지엄, 한국연극 2010 3월호>
2010년 1월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렸던 현대일본희곡 낭독 공연의 마지막날 심포지엄으로 데라야마 슈지의 작품세계를 다루었다고 한다. 극작가 이강백과 오태석도 참석했었고…. 데라야마 슈지의 정신세계에서 큰 배움을 얻었던 내가, 1월 초부터 대학로에서 출퇴근하는 내가, 이런 연극 행사가 열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다 헛짓이었다.
데라야마 슈지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절박한 냄새를 맡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시대정신의 극단으로 치달았는데, 데라야마는 그 예술적 극단성이 자신의 비극적인 성장과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거기서 그의 쓸쓸한 페이소스가 진하게 풍겨져나온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9세 때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고, 그 이후 어머니는 미군 부대와 술집으로 돈 벌러 나갔다고 한다. 전후(戰後) 일본사회의 '아버지 없음'을, 시대의 추악함과 상실감을, 데라야마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 없음'으로부터 미학적으로 길어올려서 당대를 풍미했다. 그의 이름은 연극쟁이들에게는 거의 전설이 된 것 같다. (데라야마 슈지의 한국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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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무렵부터였을까. 장래 무어가 되고 싶냐고 묻는 이들에게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쑥쓰럽게 웃으며 대답했었다. 사람들의 머쓱한 반응들이 생각난다. 나의 그 대답은, 내게 특정 직업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오만함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훗날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어 있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을 확고히 찾은 게 분명하리라는 나름의 예견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 대답에 대해서 좀 더 분명히 알겠다.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의 세계는 대개 '법, 복종, 권위, 질서' 등으로 상징된다. 김윤미의 말마따나, 아버지의 세계를 물려받는 데 실패하고, 아버지의 세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세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을 겪은 후 스스로 하나의 권위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광장>의 이명준이 그러하고, 알베르 까뮈의 소설들의 등장인물이 그러하며, 이는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현대소설들의 주인공에 해당되는 말이리라. 아버지가 없는 세계, 또는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한 세계에서, 아버지 찾기― 다시 말해, 자아 찾기.
아직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의 외부적 조건과 자신 사이에 느껴지는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이물감을 나는 안다. 언어로 풀어놓진 못할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프로이트의 가족로망쓰 이론대로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적으로 살해하는 진통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자식에게 가하는 부모의 '정신적인' 죄악은 그 항목을 이루 셀 수 없이 흔하며, 그것을 자식이 '죄악'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에, 그 죄악의 자물쇠는 풀리기 시작한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이 세계의 필연적인 이치다. 어쩌면… 개인의 완전한 독립이란, 부모에게 상처주지 않고 부모에게 벌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이 혹독한 세계에 아버지와는 다른 자신만의 방법으로 맞설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일 터이고….
어느 평론가였나 소설가였나, 김훈의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아버지를 증오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썼던 게 생각난다. <안나 까레리나>의 말미에서 레빈은 아버지가 되었고,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혼란스럽고 무언가 짜증스러운 기분에 빠져든다. 레빈은 러시아의 지주 계급으로서 여전히 세계와 맞서는 방안을 고뇌하고 있었고, 그것은 톨스토이의 고뇌이기도 했다…. 장자의 구절은 좀 더 직접적으로 '아버지-세계-자아'의 엄정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 되기'란, 알고 보면, 얼마나 무섭도록 시린 일일 것인지….
"廬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惟恐其似己也"
(언청이가 밤중에 그 자식을 낳고서는 급히 불을 들어 비춰보았다. 서두른 까닭인즉 행여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나의 바람은 언제나 유효하다. 그것이 '생존'에 대한 갈급한 바람이라고 고백한다 한들 누가 그에 대해 사치스러운 말이라 욕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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